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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학 기초·SLR tec.

[스크랩] 철학이 없는 풍경은 공허해-풍경사진

by 동아스포츠 / 相 和 2018. 6. 30.

처녀지였던 요세미티·옐로스톤·데쓰밸리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이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지금이야 차고 넘치는 진부한 풍경입니다. 그러나 사진이 발명된 지 얼마 안 되는 1860년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서부 대자연의 신비에 넋을 잃었습니다. 명망있는 사진가들이 서부로 향했습니다. 지질 조사를 위해 촬영했던 처녀지의 풍경이 예술의 옷을 입고 재탄생했습니다.

사람들은 안셀 아담스(1902~1984) 같은 당대 최고의 사진가들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풍경사진에 열광했습니다. 유명한 F64클럽이 결성된 것도 이 시기의 일입니다. 요세미티를 비롯한 서부 국립공원의 풍경 사진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안셀 아담스는 미국 사진사에 사진을 가장 많이 판매한 사진가 중의 하나로 손꼽힙니다. 그는 풍경사진의 전성시대를 누렸습니다.

풍경사진이 인기를 끌자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나섰습니다. 누가 더 화려한가, 누가 더 아름다운가로 승부했습니다. 그러나 ‘듣기 좋은 콧노래’도 한두 번입니다. 풍경사진이 쏟아지다 보니 시각의 내성이 작동했습니다. 내성은 중독현상을 불러옵니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합니다. 서부 풍경 사진은 더 이상 구매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수잔 손탁의 풍경사진 비판은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기도 하지만 고갈시키기도 한다”며 소재주의와 탐미주의 빠진 풍경사진가들에게 일침을 가했습니다. 예술은 창조적인 아름다움과 철학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사진가들은 ‘더 강한 장면’을 찾아서 지구촌 오지로 향합니다. 아프리카의 밀림, 아마존의 늪, 깊은 바다 속, 북극과 남극에까지 진출합니다. 신비한 자연현상과 현란한 색으로 승부하려 듭니다. 이제 시각의 내성이 극에 다다랐습니다. 우주의 신비를 담은 NASA의 사진도 이제는 진부한 시대가 됐습니다. 풍경사진의 종착지는 어디일까요. 지금 우리나라 사진계도 비슷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철학이 없는 풍경은 공허합니다. 소재가 떨어지면 바닥을 드러냅니다. 자연풍경을 대하는 서구의 미학이 불과 100년 만에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풍경사진은 이제 예술의 경계 밖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풍경사진의 위기는 동양미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풍경사진의 역사를 산수화와 맞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풍경사진과 산수화는 표현형식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사진이 흑백에서 컬러로 색의 자극을 더해 갔다면 산수화는 채색에서 수묵산수화로 색을 빼는 경향을 보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등장한 산수화는 당(唐)대 때까지만 해도 채색 산수화가 주류를 이룹니다. 그러나 왕유·미불과 같은 걸출한 문인화가들이 등장하면서 수묵산수화가 중국 회화를 이끌어왔고, 송(宋)대에 이르러 꽃을 피웁니다.



이는 자연을 대하는 동서양의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미국의 랜드스케이프 사진은 탐구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 자체에 방점을 둡니다. 산수화는 자연에서 배우는 정신을 중시합니다. 자연은 스승이었습니다. 무위자연과 상선약수의 철학이 보여주듯 산수화는 비움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색(色)을 빼고, 형(形)을 단순하게 처리합니다. 동양화에서 선(線)이 발달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수묵산수화의 추상적인 표현 기법은 서양의 미니멀리즘(minimalism)과도 통합니다. 미니멀리즘은 산업혁명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물질의 과잉에 대한 반성에 나왔습니다. 예술에서 기교를 최소화하고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리얼리티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니멀리즘은 예술뿐만 아니라 철학·음악·건축·패션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최근 젊은층 사이에 일고 있는 ‘안 쓰는 살림살이 버리기’ 열풍도 미니멀리즘과 관계가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은 불교와 도교 등 동양철학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산수화는 이미 오래 전에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실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나라 때 화가이자 비평가인 심종건(沈宗騫)은 시대를 아우르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무릇 ‘華(화)’라는 것은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고, ‘質(질)’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이 안에 감추어진 것이다. 그러한 즉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난 華(화)는 한때 널리 떠다니는 허황한 명성을 얻지만, 아름다움이 안에 감추어진 質(질)은 천고에 알아주는 사람을 얻는다.”

비울수록 내성이 줄어듭니다. 단순할수록 아름답습니다. 위기에 처한 풍경사진의 답을 미니멀리즘에서 찾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①] 마음의 근육에서 힘을 빼라 

설 익은 듯한 자유로운 경지 … 단순화하는 뺄셈의 추상성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선(線)과 선(禪)’ 2014.
골프 레슨을 받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어깨 힘 빼라’입니다. 전성기 때의 어니 엘스나 박세리의 스윙을 보면 참 부드럽습니다.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것 같지만 거리도 많이 나갑니다. 정확성도 뛰어납니다. 공이 자석처럼 착착 달라붙듯이 깃대 근처에 떨어집니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습니다. 정확하게 맞추고, 세게 치려고 긴장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근육이 경직돼서 스윙이 뻣뻣해지고 뒤 땅을 치거나 빗맞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골프는 “힘 빼는 데 3년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주말 골퍼에게는 힘 빼고 부드럽게 스윙하는 것이 평생의 숙제입니다. 어디 골프만 그럴까요. 우리네 삶도, 예술도 그렇습니다.

근육의 힘을 뺀다는 것은 결국 마음을 다루는 데서 비롯됩니다. 긴장하지 말고 평상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너무 잘 하려고 조바심을 갖다보면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해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옷을 벗고, 다리를 뻗고 앉는다’

‘해의반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자(莊子)의 ‘전자방(田子方)편’에 나오는 말로 ‘옷을 벗고, 다리를 뻗고 앉는다’는 뜻입니다. 중국 전국시대 때 송의 원군(元君)은 예술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화공을 초청해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다들 일찍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먹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늦게 온 화공 하나가 원군에게 잠시 허리를 숙인 뒤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방약무인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군이 사람을 시켜 그가 뭘 하고 있는지 보게 했더니 “옷을 벗고 다리를 뻗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원군은 무릎을 치며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화공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해의반박은 자연을 따르고 세속적인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유교가 ‘치자(治者) 철학’이라면, 도가사상은 예술가의 철학입니다. 동양의 시(詩)·서(書)·화(畵)의 세계에서 해의반박은 예술가가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해의반박의 경지가 가장 잘 나타나는 분야가 산수화입니다. 호방하고 자유로운 붓질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 사상이 잘 드러납니다. 애써 꾸미지 않지만 사실적이고, 수묵화에서도 색이 느껴지고, 여백조차 사유의 공간이 됩니다.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대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녹아 있습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②] 사람 대하듯 자연 대하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가는 대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며 성장합니다. 첫째는 사람이나 사물의 형상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동양미술에서는 이를 형사(形似)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대상 자체에 담겨 있는 고유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사(神似) 또는 전신(傳神)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상에 화가 자신의 뜻을 부치고(寓意·우의), 정을 펴내는(抒情·서정) 것입니다. 그리고 표현 기법에서는 처음에는 정교하고 현란한 것으로 시작해 경지에 오르면 오를수록 평이하고 담박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는 서양화에서 말하는 구상과 추상의 개념과도 비슷합니다. 동양화 이론에서는 이를 ‘熟(숙)’과 ‘生(생)’으로 표현합니다. ‘熟(숙)’이란 ‘익을 숙’자 입니다. 오랫동안 기본기를 닦아서 형사(形似)가 일정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生(생)’이라는 한자의 개념이 재미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날 것’ 또는 ‘설익었다’는 뜻인데 이를 그림의 최상위 개념으로 둔 것입니다. 동양철학과 동양미학의 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른바 마음의 근육, 감성의 근육에서 힘을 뺀 자유로운 경지를 말합니다.

비슷한 말로 ‘대교약졸(大巧若拙)’이 있습니다. ‘큰 기교는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졸(拙)은 역설적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정말 좋은 그림은 마치 아이들이 그린 것처럼 ‘설 익은 듯한’ 구석이 있다는 뜻입니다. 추사의 세한도를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소나무 밑에 있는 집을 자세히 보면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 서툴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세한도를 보면서 집을 잘못 그렸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사진 얘기로 넘어가 볼까요. ‘사진은 덧셈으로 시작해서 뺄셈으로 끝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덧셈이란 사진을 찍을 때 가급적 많은 요소를 넣고 그 인과관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 달리 뺄셈은 화면을 단순화시켜 추상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덧셈이 ‘숙(熟)’이라면 뺄셈은 ‘생(生)’의 개념과 비슷합니다. 좋은 구도는 사진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하나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뺄셈의 사진은 압축되고 정제된 어느 한 부분을 포착해 전체를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감상자는 이미지에 살을 붙여가며 보이지 않는 장면까지 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감상의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풍경사진을 찍을 때는 풍경에 압도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덧셈의 사진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저것 다 넣다 보면 구도의 틀이 무너집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전체도 보고, 부분도 봐야 합니다. 풍경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감흥을 형용사 한 마디로 정리하거나 연상되는 뭔가를 떠올려 보는 것이 좋습니다. 덧셈에서 뺄셈으로, 추상성이 강조됩니다.

감상자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상상하게 만들어야

몇 년 전 가을, 전북 임실 국사봉에 올랐습니다. 옥정호에서 피어 오른 물안개가 산을 타고 넘습니다. 물안개는 운해가 돼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아찔한 풍경을 연출해 냅니다.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운 풍광이 넓은 지역에 걸쳐 펼쳐졌습니다. 어느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렌즈의 화각이 자꾸만 넓어졌습니다. 잠시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다시 풍경을 살폈습니다. 일정한 농담의 차이로 첩첩이 이어지는 능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수화에서나 볼 듯한 아스라한 풍경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의 깊이감이 느껴졌습니다. 망원렌즈로 갈아 끼우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모노톤의 사진이 수묵화 분위기가 납니다. 이 사진은 우리의 수묵화가 얼마나 사실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사진에 ‘선(線)’과 ‘선(禪)’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감상자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상상하게 만들어야

몇 년 전 가을, 전북 임실 국사봉에 올랐습니다. 옥정호에서 피어 오른 물안개가 산을 타고 넘습니다. 물안개는 운해가 돼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아찔한 풍경을 연출해 냅니다.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운 풍광이 넓은 지역에 걸쳐 펼쳐졌습니다. 어느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렌즈의 화각이 자꾸만 넓어졌습니다. 잠시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다시 풍경을 살폈습니다. 일정한 농담의 차이로 첩첩이 이어지는 능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수화에서나 볼 듯한 아스라한 풍경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의 깊이감이 느껴졌습니다. 망원렌즈로 갈아 끼우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모노톤의 사진이 수묵화 분위기가 납니다. 이 사진은 우리의 수묵화가 얼마나 사실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사진에 ‘선(線)’과 ‘선(禪)’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③] 소양·연구·체험의 삼박자 갖춰라 

철학·문학·과학 등 인문학적 기반 필요... 발로 찍고, 땀으로 완성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

▎다락논, 2015.
중국에서 시와 그림의 역사를 논할 때 ‘시는 당(唐)에서 끝나고, 그림은 송(宋)에서 완성된다’는 말을 합니다. 당나라 때는 이백(701년~762), 두보(712년~770), 왕유(699년 추정~759) 같은 걸출한 시인이 등장했습니다. 송대에 들어 그림은 절정을 맞습니다. 이성(919년~967 추정)과 범관(990년 추정~1027 추정), 곽희(1020년 추정~1090 추정)가 중국 회화사에 일획을 긋습니다. 곽희는 화론인 [임천고치(林泉高致)]를 저술하고 북방계 산수화 이론을 완성합니다. 임천고치는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산수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산수화의 교과서’입니다. 소식(소동파, 1036년~1101)으로 대표되는 문인화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송은 중국 예술사에서 문예부흥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슴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

특히 이 시기에는 화가들의 수양이 강조됐습니다. 붓질의 기교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배경과 경험을 중시했으며 이를 회화비평과 창작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로 인해 산수화·화조화·인물화 등 그림이 꽃을 피웠습니다. 남송의 비평가인 조희곡은 자신이 쓴 ‘고화변(古畵辯)’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슴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 눈 앞으로는 진기한 명적(名迹)을 실컷 보며, 또한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천하의 반은 되어야만 바야흐로 붓을 댈 수 있다.’

여기서 ‘만권의 책’은 인문학적인 소양을 말합니다. ‘진기한 명적’을 실컷 본다는 것은 예술 전통에 대한 연구를 강조한 말입니다. 또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노력과 체험이 밑바탕 돼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디 그림에만 해당되는 말일까요. 예술가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야 할 명언입니다.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은 위 세 가지를 몸소 실천한 화가로 생각됩니다. 그는 화원화가가 아닌 양반 출신입니다. 당시 쟁쟁한 문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창협·창흡 형제와 교류하며 학식을 쌓았습니다. 절친인 시인 이병연과 시화상간(詩畵相看)을 하면서 한층 더 성숙한 붓질을 선보였습니다. 또 중국의 산수화 이론을 섭렵하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새로운 화법을 창안했습니다.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 전국의 이름난 명승지를 누비고 다니며 실제 눈으로 본 우리나라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겸재는 생전에 금강산을 세 번이나 올랐습니다. 겸재의 금강산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겨우 세 번?”이라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산을 간다는 것을 요즘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은 시절입니다. 조선시대 때 금강산을 오른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봅니다. 호랑이 같은 맹수가 사람을 물어가던 시대입니다. 곳곳에서 산적이 출몰하기도 합니다.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칼 잘 쓰고, 활 잘 쏘는 호위무사가 동행해야 합니다. 험한 산길을 안내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산에서 먹고, 자는데 필요한 음식과 침구 등을 져 날라야 하는 노복도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수십 명이 동원됐을 겁니다.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나귀도 필요할 것입니다. 요즘 기준으로 치면 히말라야 등정쯤 되지 않을까요. 세도가의 양반이 아니면 금강산행은 꿈꾸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행히 겸재는 영조의 후원과 함께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가문의 지원을 받아 금강산에 세 번이나 오를 수 있었습니다.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성이 높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부감으로 그려진 ‘풍악내산총람’은 마치 지도를 그리듯 그림 속에 명승지 이름을 써 넣기도 했습니다. 몇 해 전 독일의 과학자들이 최신 장비를 동원해 겸재 정선이 어느 지점에서 금강산을 그렸는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점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고연희, 돌베개, 2011). 겸재는 자신이 실제 경험했던 금강산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재 조합해 하늘에서 내려다보듯이 정교하게 그렸습니다. 그가 험한 산길을 얼마나 누비고 다녔을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아는 만큼 더 보인다

나는 이 대목에서 ‘사진은 발로 찍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시에 카메라가 있었다면 겸재는 위대한 사진가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진은 시간과 공간의 전략적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시간은 사진을 찍는 시점을 뜻하며, 공간은 사진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 시간은 빛을 의미합니다. 빛에 따라 공간은 달리 보입니다. 아침 빛이 다르고, 저녁 빛이 다릅니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시간은 공간을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울주에서 찍은 다락논 사진입니다. 막 모심기가 끝난 시점입니다. 해가 뜨자 논에 고인 물에 노을빛이 반사됩니다. 판화의 질감과 비슷한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산을 깎으며 논밭을 일군 농민들의 피땀이 서려있는 듯 합니다. 논에 고인 무채색의 물과 초록의 모가 아침 빛을 받아 전혀 다른 형태와 질감을 만들어 냅니다. 시간이, 빛이 공간의 형상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시간과 맞물려 돌아가는 공간의 선택도 치밀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사진은 프레임의 예술입니다. 프레임의 안과 밖, 즉 공간의 취사선택도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온전하게 숲을 보여줄 수도 있고, 나무를 보고 숲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상징적인 기법도 있습니다. 사진에서 시간과 공간은 무한한 조합을 만들어 냅니다. 사진 작품은 그 과정에서 탄생합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시간을 달리하며 수십, 수백 번 찍어 봐야 합니다. 조희곡의 말처럼 사진가의 ‘발자국이 천하의 반’이 되어야 카메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풍경사진은 발로 찍고, 땀으로 완성됩니다.

철학·문학·과학·수학 등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진은 보는 것이 반입니다.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탐구이자 자기 성찰입니다. 아는 만큼 더 보입니다. 특히 현대사진은 시대정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접근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또 문학과 미술과 음악 등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해야 합니다. 그 감동으로 가슴이 흥건히 젖어 있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기능적인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사진으로 이르는 길은 사진 밖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④]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사진과 시의 창작 과정 닮아... 옛 선비의 ‘시화상간(詩畵相看)’ 배울 만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사진1] ‘상고대’ 2015.
산수화가 발달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좋은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그림을 보고 느낀 감상을 시로 써서 그림의 여백이나 별지에 부치기도 합니다. 이를 제화시라고 합니다. 조선 초의 시인이자 학자인 성간(成侃)은 강희안의 그림을 보고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니, 예로부터 시와 그림은 일치되어 있어서, 그 경중을 조그만 차이로도 가를 수 없네(詩爲有聲畵 畵乃無聲詩 古來詩畵爲一致輕重未可分毫釐)’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신숙주를 비롯해 무려 23명의 제화시와 찬문이 별지로 붙어있습니다. 안평대군이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함께 그림을 감상하고 제화시를 쓰게 했기 때문입니다.

화가는 시적 감성 키우고 시인은 이미지 문법 익히고


▎[사진2] ‘부화(孵化)’ 2014.
겸재 정선은 그의 절친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 이병연과 ‘시화상간(詩畵相看)’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시와 그림을 바꿔 보며 감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화가는 시적 감성을 키우고, 시인은 이미지의 문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겸재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시화상간을 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시와 그림을 동일시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는 송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소식의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에서 비롯됐습니다. 소식이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시와 그림을 감상하며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말한 데서 유래합니다. 이 말은 문인화가 산수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문인화는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장르입니다. 지금도 이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시와 그림, 시와 사진을 엮어서 ‘시화집’으로 책을 냅니다. 또 잡지를 보면 앞 부분에 ‘포토포엠’이라던가 ‘시가 있는 풍경’ 같이 서로 감성이 통하는 시와 사진을 짝지어 연재하기도 합니다.

시사지 월간중앙에도 시와 사진을 엮은 ‘포토포엠’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시인에게 사진을 보여 주고 시를 쓰게 하는 방식입니다. 지난 2월 시인 이원규에게 필자가 찍은 덕유산 상고대 사진을 보냈습니다[사진1]. 추사의 [세한도]를 오마주한 작품입니다. 고사목에 핀 하얀 서리꽃에서 선비의 꼿꼿한 절개가 느껴지는 사진입니다. 그는 상고대를 ‘정신의 흰 뼈’ ‘영혼의 희디 흰 밥’으로 표현했습니다. 참 멋드러진 표현입니다. 현대판 ‘시화상간’이 아닐까요.

사진은 시와 그림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미술의 한 분야로 취급하지만 창작 과정을 보면 시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좋은 시는 압축되고 정제된 언어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시를 읽으면 시가 묘사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영화 [동주]가 개봉돼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의 시 ‘자화상’의 한 구절을 옮겨 볼까요.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우물 속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잔잔한 물은 거울이 돼 하늘을 비춥니다. 달이 있고, 구름이 흐릅니다. 그리고 우물을 들여다 보는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시를 읽으면 우물을 들여다보며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는 거울이나 물그림자 등 ‘반영’을 소재로 즐겨 다루는 사진의 형식과 많이 닮았습니다.

어떤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묘사하는 방식도 서로 비슷합니다. 다음은 김춘수의 시 ‘꽃’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수분과 섬유질, 그리고 색소로 이루어진 ‘물질(몸짓)’이 시인과의 교감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의 ‘꽃’으로 다가옵니다. 사진의 정신 역시 피사체와의 대화이자 교감입니다. 이를 통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을 담습니다. 사진도 시 ‘꽃’과 같이 피사체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입니다.

무엇보다도 시와 사진을 가깝게 연결시키는 것은 수사법입니다. 사진은 대상을 보고 느끼는 연상작용을 통해 의미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푸른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자유’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장미’를 보고 ‘유혹’을 느끼거나 하는 겁니다. 자유나 유혹은 원관념 새와 장미가 불러온 마음의 상 즉 ‘심상’입니다. 그리고 비교되는 두 대상의 개념이 서로 거리가 멀수록 비유법이 신선해집니다. 문학에서는 이를 직유법·은유법·의인법·제유법 등으로 표현합니다.

사진과 시의 창작 과정 닮아

사진의 표현형식 역시도 연상작용과 비슷합니다. 이미지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를 담고, 메시지를 전합니다. 감상자들은 한꺼풀 가려진 이미지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진 속에 숨겨진 비유의 뜻을 풀게 되면 희열을 느낍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비유가 풍부한 시를 많이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경북 예천에서 회룡포가 내려다 보이는 산정에 올랐습니다. 신새벽입니다. 마을을 감아 도는 곡성천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라 구름바다가 됐습니다. 운해를 뚫고 나온 가로등 불빛이 마치 알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사진2]. 나는 이 사진에 ‘부화(孵化)’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자연은 거대한 인큐베이터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넉넉하게 품습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⑤] 아름드리 노송에서 비룡의 기품 포착 

수화에서 사물 특징 포착한 추상적 표현 발달... 패턴인식→연상작용→레토릭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수화에서 사물 특징 포착한 추상적 표현 발달... 패턴인식→연상작용→레토릭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만항재 2015.
산수화에는 추상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추상’이란 ‘애매모호하고 어렵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입니다. 곁가지를 다 쳐낸 어떤 대상의 핵심만을 묘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산수화에서 바위를 그리는 회화이론인 ‘준법(峻法)’이라는 것도 추상적인 표현방법입니다. 암석의 구조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패턴을 파악한 후 그 특징을 간략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피마준’의 ‘피마’는 ‘삼나무의 껍질’로 삼베 실을 뜻합니다. 삼베 실은 뻣뻣해서 구불구불합니다. 바위의 윤곽과 금이 간 모습을 삼베 실이 늘어지듯이 그리는 방법입니다. 또 ‘부벽준’의 ‘부(斧)’는 ‘도끼 부’ 자입니다. 바위의 질감이 마치 도끼로 쪼갠 듯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지층 활동이 왕성했던 바위를 보면 각이 져 있습니다. ‘미점준’이라는 준법도 있습니다. ‘쌀 미’ 자를 씁니다. 바위의 윤곽선을 그린 다음 붓을 옆으로 눕혀 마치 쌀알처럼 툭툭 찍는 기법입니다. 낮은 것은 먹이 짙게, 높은 것은 엷게 찍습니다. 바위 절벽에 듬성듬성 있는 나무의 모습이 그럴 듯하게 나타납니다.

바위 그리는 회화이론인 ‘준법’

나무도 칩엽수·낙엽수·고목 등 수종에 따라 특징을 포착해 서로 다른 붓질을 구사합니다. 나무를 그리는 방법을 ‘수지법(樹枝法)’이라고 합니다. 그중에는 ‘해조묘(蟹爪描)’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나무나 죽은 고목을 그릴 때 즐겨 쓰는 방법입니다. 한자어 그대로 ‘게의 발’처럼 다소 거칠고 날카롭게 나뭇가지를 묘사합니다.

피마준의 ‘삼베 실’이나 부벽준의 ‘도끼 자국’, 미점준의 ‘쌀’, 해조묘의 ‘게의 발’은 자연계에서 따온 일종의 패턴입니다. 바위의 모양은 지형과 지세에 따라서 각기 다르지만 공통분모를 가진 어떤 특징, 즉 패턴이 있습니다. 준법이라는 것은 결국 패턴을 활용한 회화이론입니다.

산수화에서 추상적인 표현이 발달한 것은 문자의 영향도 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한자는 상형문자로 사물을 본 떠 만든 회화문자에서 출발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자 자체가 ‘추상’의 개념과 통합니다. 그래서 사물의 특징을 포착하는 패턴인식이 남다릅니다.

산수화 이론의 대부분은 어떤 대상에 대한 관찰의 결과를 기록한 겁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화가인 형호(荊浩)는 그의 화론인 ‘필법기(筆法記)’에서 소나무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름드리 큰 노송은 껍질이 묵어 푸른 이끼가 끼어있는데다, 넓적한 비늘을 번득이며 공중으로 치솟아 있는 것이 마치 서리어 있던 ‘규룡(뿔이 있는 어린 용)’이 은하수를 향해 올라가는 기세였다. 숲을 이룬 것은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의기가 양양한 듯이 보이며, 그렇지 못해 외따로 서 있는 것은 마치 절개를 지키는 고사(高士)가 짐짓 구부리고 있는 듯했다. 또 어떤 것은 뿌리가 구불구불 땅을 뚫고 나와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크게 흐르는 물 위로 비스듬히 누워있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언덕에 걸려 있는 것, 시내에 구부러져 있는 것, 이끼를 헤치고 나온 것, 바위를 찢고 서 있는 것 등 그 기이한 절경에 나는 경탄하면서 두루 그것을 관상하였다.’

소나무 껍질을 ‘용의 비늘’에 비유합니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소나무를 ‘고사(高士)’가 구부리고 있는 듯하다며 의인법을 사용합니다. 산수화가 선 위주로 대충대충 그린 것 같지만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는 거의 소나무가 등장합니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 찬 숲을 그릴 때는 지그재그로 대충대충 그린 듯합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소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았습니다.

송나라 곽희(郭熙, 1001~1090년)는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산과 물의 형상을 마치 눈으로 보는 듯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산은 큰 물체이다. 그 형상이 솟아 빼어난 듯, 거만한 듯, 조망이 널찍하여 툭 터져 있는 듯,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듯, 다리를 펴고 앉아 있는 듯, 둥그스럼하게 큰 듯, 웅장하고 호방한 듯, 정신을 전일하게 한 듯, 엄중한 듯, 눈이 예쁘게 뒤돌아 보는 듯, 조회에서 읍하고 있는 듯, 위에 덮개가 있는 듯, 아래에 무엇을 타고 있는 듯, 앞에 의거할 것이 있는 듯, 뒤에 기댈 것이 있는 듯 해야 한다. 또 아래로 조감하면서 마치 무엇에 임해서 보는 듯 하게 해야 하고 아래에서 노닐면서 마치 무엇을 지휘하는 듯하게 해야 이것이 곧 산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물은 활동하는 사물이다. 그 형상이 깊고 고요한 듯, 부드럽고 매끄러운 듯, 살찌고 기름진 듯, 넓고 넓은 듯, 빙빙 돌아 흐르는 듯, 살찌고 기름진 듯, 용솟음치며 다가오는 듯, 격렬하게 쏘는 듯, 샘이 많은 듯, 끝없이 멀리 흘러가는 듯하게 해야 하고, 또 폭포는 하늘에서 꽂히듯 하고, 급히 흘러 부딪히며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 안개와 구름이 끼어 빼어나게 고은 듯, 계곡에 햇빛이 비치어 찬란한 듯하면, 이것이 곧 물의 활동하는 모습이다.’

산수화의 놀라운 사실성

세심한 관찰과 패턴인식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그림에 반영됩니다. 패턴인식이 연상작용을 불러 일으키고, 연상작용은 이미지의 레토릭으로 이어집니다. 그림이건 사진이건 풍성한 비유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이미지에 한풀 가려진 이야기를 담습니다.

무릎을 치게 하는 비유는 사실성을 담보합니다. 풍경사진을 찍다 보면 우리의 산수화가 얼마나 사실적인지 감탄하게 됩니다. 사진은 속성상 산수화와 같은 추상적인 표현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연계의 특정 대상의 패턴을 인식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면 추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빛의 활용, 피사계 심도, 렌즈의 선택과 활용 등 사진적인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세심한 관찰력입니다.

사진은 함백산에서 바라 본 만항재 일대의 모습입니다. 곽희는 산이 높게 보이려면 허리 춤에 운해가 드리워져 있어야 하고, 강이 길어 보이려면 끊김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산 봉우리를 에워싸듯 드리워진 운해가 산의 높이와 깊이감을 더해 줍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⑥] 그림에서 버려야 할 네 가지 ‘사첨속뢰’(바르지 않고 달콤하고 속되고 의지하는 것) 

일관된 미의식 갖고 기본기에 충실해야... 감탄 넘어 감동 전해야 


▎겨울나무, 2012
우리에게는 산수화라는 아름다운 전통문화가 있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할까요. 옛 그림을 감상하고, 회화이론을 들여다 보면 사진, 특히 풍경사진을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동양화 회화이론 중에 사진에서 되새겨 볼 만한 글을 소개합니다. 중국 원나라의 황공망이라는 화가는 그의 저서 [사산수결(寫山水訣)]에서 그림에서 버려야 할 것 네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커다란 요체는 바르지 않은 것(邪·사), 달콤한 것(甛·첨), 속된 것(俗·속), 의지하는 것(賴·뢰)의 네 글자를 버리는 것이다(作畵大要, 去邪甛俗賴四箇字).’

‘근본도 없이 사기치지 말라’

어려운 한자어입니다. 뜻풀이를 하면 그림뿐만 아니라 사진에서도 큰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황공망은 ‘사첨속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후대의 화가나 비평가들이 이를 나름대로 해석한 글이 전해집니다. 명나라 초 왕불(1362~1415)은 ‘사(邪)’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혹 어떤 등급의 사람들은 일에 옛 것을 배우지 않은 채 자신의 법을 행한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처발라 윤을 내고는 천취에 맞았다고 말하며, 그 아래 등급의 사람들은 붓끝을 뒤섞고 망령되이 가지와 마디를 만들어내며 음양을 이해하지 못하고 청탁도 구별하지 못하는데, 이는 모두 사(邪)라고 개괄할 수 있다.”

이 말은 기본기를 닦지도 않고, 공부도 않으면서, 철학적인 바탕도 없이 함부로 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근본도 없이 사기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진, 특히 현대사진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진이 난해하다 보니 난해함에 편승해 무임승차를 하는 것입니다. 생경하고 조잡한 사진에 그럴듯한 해석을 붙여 출품하는 것이지요. 또 디지털 시대를 맞아 사진에 가해지는 지나친 ‘뽀샵질’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느껴집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사진강의 노트]의 저자 필립 퍼키스도 황공망과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보여 지는 것, 그 자체. 너무 성급하게 메타포나 상징으로 건너뛰지 마라.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아직 이르다. 이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껴야 한다.”

기본기부터 다듬으라는 얘기입니다. ‘걷지도 못하면서 뛰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처음 사진을 찍을 때는 피사체의 밝고 어두움만 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똑같이 찍을 것인가’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빛의 종류나 방향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느낌은 어느 정도 훈련을 거친 다음에야 알 수 있습니다. 사진에 ‘왕도’는 없습니다.

‘첨(甛)’과 ‘속(俗)’에 대해서는 ‘전신(傳神, 정신을 전한다는 뜻)을 소홀히 하고, 화려한 색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첨(甛)’은 ‘달다’는 뜻입니다. 영화 [첨밀밀(甛蜜蜜)]에 나오는 것과 같은 한자어입니다. 주제가를 들어보면 그 선율이 글자 뜻처럼 꿀처럼 달콤합니다. 깊이가 없는 단맛은 금세 식상하게 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초딩 입맛’이지요. ‘속(俗)’은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풍경사진을 찍을 때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비록 자연의 색이라도 너무 화려하면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프레이밍을 달리하거나 흑백으로 처리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진가의 일관된 미의식입니다.

청나라 때 화가이자 비평가인 심종건(沈宗騫)은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붉고 푸른 아름다운 광채를 일러 ‘華(화)’라고 하는데 이 또한 畵道(화도)에서 폐할 것은 아니며, 내가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곧 필묵 사이의 일종의 고운 태이다…(중략)…무릇 ‘華(화)’라는 것은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고, ‘質(질)’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이 안에 감추어진 것이다. 그러한 즉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난 화는 한때 널리 떠다니는 허황한 명성을 얻지만, 아름다움이 안에 감추어진 ‘質(질)’은 천고에 알아주는 사람을 얻는다.’

요즘 기준에 비추어 보아도 참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SNS에서 ‘좋아요’를 많이 얻기 위해 화려한 색채만을 추구하지 않나요? ‘좋아요’가 많다는 것은 대중적인 인기의 척도는 될 수는 있지만 사진의 품질을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SNS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그 화려한 색채로 인해 눈길을 사진이 있는가 하면, 보면 볼수록 좋아지는 것도 있습니다. 좋은 사진은 ‘감탄’을 너머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뢰(賴)’는 ‘의지한다’는 뜻으로 ‘모방과 표절’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처음 사진을 배울 때는 유명 사진가들의 작품을 흉내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훈련’의 개념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지만 자기만의 창의성이 더해져야 비로소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청대의 소매신(邵梅臣)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능히 옛 사람과 합일될 수 있고, 또한 능히 고인을 벗어날 수 있는 것, 이것이 옛 것을 먹되 옛 것에 의해 목이 메지 않는 것이다.”

모방은 훈련에 그쳐야

세계적인 풍경사진가 마이클 케냐의 ‘솔섬’ 사진이 국내에서 송사에 휘말린 적이 있습니다. 한 대기업이 국내 작가가 촬영한 솔섬 사진을 광고에 썼기 때문입니다. 논란 끝에 원고인 마이클 케냐 측이 패소했지만 뒷맛이 개운치는 않습니다. 법적인 판단은 존중하지만 사진가의 직업윤리로서는 원고 측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케냐는 몇 년 전 한국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석해서 이 사건에 대해서 “아마추어는 그럴 수 있지만 프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뼈아픈 말을 남겼습니다.

-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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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7)] 일상에서 아름다움 찾는 ‘미학적 창조’ 

나름의 눈으로 풍경을 해석하는 독창성 필요... 자연과 인간의 조화도 필수 


▎(사진 1) 아침, 2012

자연에는 직선이 없습니다. 해도, 달도, 산도, 강도 모두 곡선입니다. 직선은 대부분 문명의 흔적입니다. 풍경사진을 찍다 보면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직선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파트·포장도로·전봇대 같은 것들입니다. 대부분의 풍경사진가들은 이를 싫어합니다. 곡선과 직선, 원시와 문명이 한 프레임 안에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이는 산에 있는 “철탑이나 전봇대를 다 뽑아버리고 싶다”며 투덜대기도 합니다. 이들의 머리 속에는 조선시대의 아득한 산수경을 담은 그림 한 폭이 박혀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진은 시대상 반영

사진가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고 밤을 새워 달립니다. 몇 날, 몇 일 산에서 밤을 새기도 합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풍경이 나타났는데 불쑥 철탑과 송전선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면 김새는 일이겠지요. 이해가 갑니다. 풍경사진을 찍는 이유 중의 하나는 태고적 신비가 가득 담긴 원시적인 자연풍경을 보며 일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힐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더 깊은 산속을 찾아 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진가의 미의식과 자연을 대하는 철학입니다. 사진은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21세기에 살면서 몇 백년, 몇 천년 전의 풍경을 고집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찍는 것은 조금만 훈련을 받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있습니다. 프로 사진가의 미의식은 달라야 합니다. 창의적이어야 합니다. 일상적으로 흔히 보는 장면에서 새로운 것,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고 이를 담아내는 ‘미학적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평범한 풍경이나 사물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미학적 창조’가 있어야 합니다. 풍경을 해석하는 남과 다른 차별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진 1]은 해뜰 무렵 울주에서 길을 가다가 찍은 것입니다. 산 허리에 높게 솟은 송전철탑이 눈에 쏙 들어옵니다. 산 너머에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철탑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 아래는 아직 어둡습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산에서 철탑 하나만 빛을 내며 반짝입니다. 생각나는 말이 있습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얻는다’와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경구입니다. 프레이밍을 할 때 일부러 앞에 전봇대를 넣었습니다. 높이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인 철탑과의 어울림도 생각했습니다. 높이 솟아 있으니 다른 곳보다 빛을 먼저 받습니다. ‘높이’가 주는 상징성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시로 치면 제유법이라고 할까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풍경에서 이른바 ‘경치밖의 뜻(景外意)’이 느껴집니다.

중국 송나라 때 산수화가인 곽희가 쓴 회화이론서 [임천고치] 산수훈(山水訓) 편에는 자연 풍경을 대하는 화가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는 글이 있습니다. ‘산수에는 한번 지나가볼 만한 것, 멀리 바라볼 만한 것, 자유로이 노닐어 볼 만한 것, 그곳에서 살아볼 만한 것 등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중략)…한 번 지나가볼 만한 것과 멀리 바라볼 만한 것은 그곳에서 살아볼 만한 것과 자유로이 노닐어 볼 만한 것을 얻게 됨만 못하다…(중략)…군자가 임천을 갈망하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곳을 아름다운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가는 마땅히 이러한 뜻으로 제작해야 할 것이며, 감상자 또한 마땅히 이러한 뜻으로 그것을 궁구해야 할 것이다(중국화론선집, 김기주 역주, 2012, 미술문화).’

역설적으로 말하면 ‘정말 아름다운 경치는 사람이 살 수 있고, 노닐어보고 싶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오늘에 되새겨 볼까요. 곽희의 자연관을 빌린다면 히말라야의 설산이 아무리 장엄한들 그리고 아프리카의 밀림이 아무리 신비롭다 하더라도 ‘한 번 지나가볼 만한 곳이거나 멀리 바라볼 만한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살 수 있고, 노닐어 볼 만한 곳이 아니기에 아름다운 경치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동양미학의 묘미가 있습니다. 산수화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정신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입니다. 산수화에는 풍경이 주는 감탄을 넘어 감동을 주는 ‘경치 밖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배우는 철리적 이치 같은 것입니다. 곽희는 이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물은 산을 얼굴로 삼고, 정자를 눈썹과 눈으로 삼고,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을 그 정신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물은 산을 얻어야 아름답게 되고, 정자를 얻어야 명쾌하게 되며,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을 얻어야 정신이 넓게 펴져 환하게 된다.”

감동을 주는 ‘경치 밖의 뜻’


▎(사진 2) 분당, 2015

그래서일까요. 산수화에는 그곳에서 터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밭을 가는 농부, 고기를 잡는 어부, 나귀에 짐을 싣고 길을 가는 상인, 계곡물에 발을 씻는 선비, 소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즐기는 은사의 모습들이 묘사됩니다. 사람을 아주 작게 그리는 것은 대자연의 숭고미를 강조하기 위한 기술입니다. 또 산허리춤에는 정자가 있고, 하천에는 구름다리나 섶다리가 보입니다. 우마차를 비롯해 기와집과 초가집 등 주택도 나옵니다. 이 역시 문명의 흔적입니다. 요즘과 비교한다면 전망대, 자동차, 아파트 같은 것들입니다. 풍경사진을 찍는 데 전봇대나 아파트가 눈에 거슬릴 이유가 없습니다. 예술은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사진도 예외가 아닙니다. 풍경사진을 잘 찍으려면 이를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 풀어내는 미학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9)] 수묵산수화에 비친 오묘한 선(禪)의 세계 

가슴 서늘한 ‘깨달음의 미학’ … 신비주의적 색채에 형이상학적 이미지



▎돈오, 2013

예술은 시대와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철학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대정신을 이끌어 갑니다. 산수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은 노장사상입니다. 유교가 규범을 중시하고 예절을 강조하는 생활 철학이라면 노장사상, 도교는 현실을 관조하는 은자의 철학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형이상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의 선종도 산수화의 정신을 더욱 살지게 했습니다. 선종은 명상수련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중시합니다. 불교의 선(禪)은 노장과 사상과 결합하면서 중국적인 색을 드러냅니다. 문자가 중심이 되는 경전보다는 체험적 직관에 무게를 둡니다. 선사상이 반영된 산수화는 ‘비움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비움은 사색과 명상의 공간이 됩니다.

중국 명나라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동기창(1555~1636)은 선종에서 말하는 깨우침, 즉 돈오의 미학을 산수화에 접목하려 했습니다. 그는 먼저 산수화를 남종화와 북종화로 분류했습니다. 남종화는 수묵산수화에서 보듯이 간결하고 서정적이며 주관성이 강합니다. 북종화는 채색산수화가 주종을 이루며 정교한 자연주의 화풍을 말합니다.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린 남종화는 화원화가가 주축인 북종화에 비해 기교는 떨어지지만 그림에 담긴 정신을 중시합니다.

선사상 반영된 ‘비움의 미학’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

그런데 동기창의 ‘남북종론’은 선종의 2대 분파인 혜능의 남종선(南宗禪)과 신수의 북종선(北宗禪)에서 따온 말입니다. 남종과 북종은 수행 방법을 달리합니다. 남종선은 일순간에 문득 깨닫는 돈오(頓悟)를, 북종선은 순서를 밟아 수행해 점차 높은 단계의 경지로 나아가 깨달음에 이른다는 점수(漸修)를 중시합니다. 문인화가와 화원화가의 수련 방법과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남종선이 중국 불교의 중심이 되면서 산수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돈오의 깨달음이 화제(畵題)로 올랐습니다. 현실에서 초탈한 맑고 순수한 정신세계를 그림에 반영하려 했습니다. 이는 조선후기 문인 화가들에게도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난초 꽃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뜻하지 않게 참모습(性中天)이 드러났다. 문을 닫고 마음 깊은 곳을 찾아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의 불이선이다(不作蘭花二十年偶然寫出性中天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불이선은 ‘인식과 세계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일컫는 말입니다. 한자 성중천(性中天)은 정확한 번역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직역하면 ‘마음 속의 하늘’이지만 ‘참모습’으로 번역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는 난초에 대한 ‘추상과 심상’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객관적으로 보는 난과 주관적으로 느끼는 난은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확신에 찬 깨우침을 ‘불이선’에 비유한 것이지요. 그림을 보며 스스로 흡족해 하는 추사의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조선후기의 화가 신위(1769-1845)는 “화가가 그림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선가에서의 그 오묘한 깨달음과 같고, 이러한 깨달음의 세계는 형태나 채색을 공교하게 잘 그려서 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의 저자 박석은 예술에 투영된 선종의 미학을 소박미·단순미·평담미로 정리합니다. 그러면서 ‘염화미소(拈花微笑)’를 예로 듭니다. 선종의 기원은 꽃과 미소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가 설법 중에 연꽃 한 송이를 보여줍니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습니다. 말 없이 이심전심으로 불법을 전한 것입니다. 염화미소에는 선종의 심미관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소박하지만 세련되고, 단순하지만 심오한 선종의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불교의 선사상이 가장 잘 표현된 예술장르가 수묵산수화입니다. 선 중심의 단순한 구도와 먹의 농담만으로 넓고 깊은 선(禪)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조선후기 김정희, 최북, 전기의 수묵산수화는 붓질이 즉흥적이고 거침이 없습니다. 졸박하지만 ‘문득 깨닫는다’는 돈오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선(禪)은 오늘날에도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예술의 주제로 등장합니다. 사진에서 선의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사진가로 마이클 케냐를 꼽습니다. 그는 수묵산수화풍의 사진을 미니멀리즘이라는 예술형식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케냐의 풍경사진의 구성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러나 맑고 그윽한 선의 세계를 연출합니다. 흑백 필름을 이용해 대부분 1초 이상의 장노출로 찍습니다. 흔들리는 것은 사라지고 고정된 것만 남아있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경지가 느껴집니다.

배병우의 소나무도 ‘돈오’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경주 삼릉의 소나무를 즐겨 찍습니다. 무덤 주변에 심는 소나무를 도리솔이라고 합니다. 도리솔은 땅과 하늘, 삶과 죽음을 잇습니다. 사진가는 이른 새벽 뿌연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시간에 사진을 찍습니다.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곡선과 흑백의 그라데이션으로 삶과 죽음의 변주곡을 연주합니다. 큰 울림이 있습니다. 가슴 서늘한 깨우침을 줍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

돈오의 철학은 일상에서의 각성을 중시합니다. 깨달음을 체험한 선사들의 기록을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 깨닫고, 닭 우는 소리에 깨닫고, 마당 쓸다가 깨닫습니다. 필자도 비슷한 영적 체험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송광사에서 들렀습니다. 이른 새벽 노스님이 예불을 드리러 대웅전으로 들어섭니다. 깜깜한 어둠에 싸인 산사는 고요하고 적막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스님이 대웅전 문을 엽니다. 불빛이 밖으로 새 나옵니다. ‘삐거덕’하는 문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거의 무아지경에서 셔터를 눌렀습니다.

사진가 브레송은 “평생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을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대 사진가의 회고에서 불교적 깨달음을 봅니다. 온 마음을 다해 찍는 사진의 순간 역시 돈오와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 아닐까요.


정지된 시간의 풍경 

6년 전에 취미활동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처음엔 무엇을 찍을 것인가 한참 고민했다. 삼성 SERI의 Photo & Culture, 중앙대 평생교육원 사진반, 서울 사진클럽 과정에 등록해 참 부지런히 쫒아다녔다. 처음에는 사물의 선과 색에서 아름다움을 보다가 점차 면과 빛의 조화를 알게 되었고, 지금은 공간과 상상을 조합하는 즐거움을 찾고 있다. 흔히들 사진을 ‘빼기(―) 예술’ 이라고 하지만 나는 ‘채우기 예술’, 즉 비워진 공간에 상상을 더하는 예술이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 상상 속에는 늘 공감과 소통이 함께 한다. 피사체와의 공감, 동료들과의 공감, 그리고 나 자신과의 공감이 필요하다.

처음 5년 동안은 꽃을 소재로 이런 저런 상상을 즐기곤 했다. 나만의 독특한 촬영기법(역광, Hi-Key, Close- Up)을 구사하면서 다양한 상상으로 꽃의 본질(유혹)을 표현하려고 했다. 꽃과 소통하는 것은 지루하지가 않다. 언젠가 유명 사진작가가 ‘왜 꽃 사진을 즐겨 찍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꽃은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잖아요,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훗날 나이가 들면서 오는 외로움을 즐기기에 좋은 수단이기도 하지요’라고. 꽃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근해 자기만의 상상을 그려낼 수 있는 소통의 상대다. 그래서 지금도 꽃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요즘은 또다른 소재와 주제를 찾아 몰입하고 있다. 일상의 바쁜 흐름 속에 잠시 정지된 듯한 느림의 순간을 풍경사진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다.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과거의 소중한 추억과, 지금의 진정한 내 모습을, 그리고 미래의 아름다운 상상이 함께 춤을 추는 시간의 경계를 상상 속에 넣어 보는 작업이다. 얼마 전엔 역삼동 GS타워 ‘스트리트 갤러리’에서 동아리(클럽RGB) 그룹 사진전에 ‘정지된 시간’으로 참여해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풍경사진은 낯선 곳의 설레임과 익숙한 곳의 정겨움이 함께 한다. 그 속에서 정지된 시간을 찾아 나만의 또 다른 앵글 속의 상상을 즐겨 보려고 한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15)] 천기의 패턴을 읽고 활용하라 

 

구름·바람·눈·비에 따라 풍광 달라져... 경험의 데이터베이스 채워야

▎신불산 단풍, 2014.
우리는 농경 민족의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날씨에 민감합니다. 스마트폰 일기예보 애플리케이션(앱)은 기본 사양입니다. 스위치를 켜면 날씨부터 뜹니다. 심지어 거리 광고용 전광판에서도 일기예보가 나옵니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신문과 방송에서 일기예보는 여전히 비중있게 다룹니다.

특히 풍경사진가들은 날씨에 예민합니다. ‘고수’들은 날씨를 예측하는 ‘신통력’이 있습니다. ‘오늘 새벽 양수리에 가면 물안개가 핀다’거나 ‘날이 맑아 함백산에 오르면 은하수를 볼 수 있다’ ‘남한산성에 오르면 노을이 좋겠다’ 등등. 무지개가 뜨는 것까지 예측합니다. 물안개·노을·운해·무지개 같은 기상현상은 일기예보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랜 경험으로 날씨의 패턴을 꿰뚫고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전국민의 사진작가 시대’에 날씨를 예견하는 능력은 영업(?)이 되기도 합니다. 몇 년 전 겨울바다의 물안개를 찍으러 울산 강양항에 간 적이 있습니다. 컴컴한 새벽이었습니다. 바닷가에는 많은 사람이 삼각대를 설치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전국 각지에서 온 관광버스가 서 있었습니다. 그중에 ‘사진작가 고00와 함께 하는 풍경사진’이라는 광고판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인솔자인 고모씨는 유명 사진가는 아니지만 사진교실을 운영하면서 수강생들과 사진촬영 명소를 순회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날씨를 예측하기 위해 그동안 자신의 경험을 데이터베이스(DB)화 하고, 일기예보는 물론 국내외 유명 기상사이트 정보를 모으고 위성사진까지 분석한다고 합니다. 또 전국에 있는 아마추어 풍경사진가들과 연계해 매일 기상정보를 주고 받습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그날 강양항 일대에는 환상적인 물안개와 함께 소위 ‘오메가 일출(해가 뜰 때 수평선에 반영이 돼 오메가 모양(Ω)이 나타나는 현상)’을 연출했습니다.

날씨 중시해야 … 소재주의에 빠질 위험은 경계


▎강양항, 2013.
물론 사진을 날씨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풍경사진이 ‘운칠기삼’에 기대면 소재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상 상황은 풍경사진에서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사진은 시간과 공간의 전략적인 선택으로 만들어 집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 느낌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원하는 날씨와 빛, 색이 양념처럼 어우러지면 이른바 ‘경치 밖의 뜻’을 담기가 훨씬 더 수월해 집니다.

중국 송나라 시대 화가이자 이론가인 곽희는 그의 저서 [임천고치]에서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계절별로 매우 세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구름과 비, 눈을 묘사한 대목을 볼까요. ‘실제 산수의 구름기운은 네 계절이 같지 않다. 봄에는 수증기가 위로 오르게 보이고, 여름에는 자욱하고 왕성하게, 가을에는 성글고 얇게, 겨울에는 어두컴컴하고 담담해 보인다…(중략)…비 지나가는 여름 산, 비 내릴 듯한 짙은 구름, 별안간 부는 바람과 쏟아붓는 듯한 비가 있고, 또 회오리 바람과 쏟아붓는 듯한 비, 여름 산에 비 그치고 구름 돌아감, 여름 비가 계곡에 폭포처럼 뿌림…(중략)…겨울에는 눈이 내릴 듯한 찬 구름, 음침한 겨울에 펑펑 내리는 눈, 음침한 겨울에 내리는 싸락눈, 빙글빙글 도는 바람과 회오리치면서 내리는 눈, 산골 물 위에 내린 적은 눈, 사방이 시냇가이고 멀리 눈 내리는 광경, 눈 내린 후의 산가, 눈 속의 어부 집, 배 떠날 준비를 하면 술을 삼, 눈을 밟으며 멀리 술 사러 감, 눈 온 시냇가의 평원 경치가 있고, 또 바람 불고 눈 내리는 평원 경치, 산골 물 끊어지고 소나무에 눈 덮힘, 소나무들이 있는 집에 취한 듯 마구 내리는 눈, 강가 정자에서 바람을 읊조리며 시를 짓는 모습 등이 있는데 모두가 겨울경치의 제목이 된다([중국화론선집], 김기주 역, 미술문화, 2012).’

일대를 풍미한 위대한 화가답게 관찰력이 뛰어납니다. 바람 불고 비가 오는 여름 풍경과 눈 내리는 겨울 서정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합니다. 기록의 힘이 놀랍습니다. 평소 천기를 읽고 그 경험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쌓은 흔적이 보입니다. 구름·바람·눈·비 등 산수화의 다양한 소재를 계절별로 정리하고 패턴화 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지구가 탄생한 이후 단 하루도 같은 날씨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비슷한 유형의 ‘패턴’은 반복됩니다. 기상청의 수퍼컴퓨터라는 것도 결국 기온·습도·풍속·지형 등 날씨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을 분석하고 그 패턴을 수식화하는 것입니다.

사진 찍으며 겪은 다양한 경험 기록해둬야

풍경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천기를 읽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요즘에는 나침반,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 밀물과 썰물, 별자리 등 천문과 관련된 스마트 폰 앱이 다양하게 나와 있습니다. 현장에서 이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사진을 찍으며 겪었던 다양한 경험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날씨뿐만 아니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 풍광의 모습을 꼼꼼하게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그림으로 그려두는 것도 좋습니다. 또 자신만이 알고 있는 풍경사진의 포인트를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맛집이나 숙소 등 사진여행에 필요한 곳도 기록해 두면 매우 편리합니다. 나중에 여행기를 쓸 때도 도움이 됩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면 패턴이 읽혀지고, 예지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는 풍경사진을 찍는 데 아주 큰 자산이 됩니다. ‘말 발자국과 수레바퀴 자국이 천하의 반은 돼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는 말은 결국 ‘경험의 데이터베이스’를 꽉 채우라는 뜻입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11)] 그러한 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산수화엔 자연의 기운, 인물화엔 정신적 기질 중요 … 기본기 닦고 내공 쌓아야 



산수화엔 자연의 기운, 인물화엔 정신적 기질 중요 … 기본기 닦고 내공 쌓아야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기원, 2015, 지리산 노고단
동양화 이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용어가 있습니다. ‘기(氣)’라는 개념입니다. 사전적 의미는 ‘활동하는 힘’을 말합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이(理)’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힘’을 뜻합니다. 만물의 존재는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라 결정된다는 이론입니다. 그 출발은 노자와 장자로 우주의 생성 변화를 기의 현상이라고 한 데서 비롯됩니다.

하늘의 기운(天氣)과 땅의 기운(地氣)을 받아 생명이 탄생하고 자랍니다. 대자연의 기운을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합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생명을 피의 순환으로 풉니다. 그래서 혈기(血氣)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또 기분(氣分)·기품(氣品) 등의 말에서 보듯이 기는 어떤 존재의 보이지 않는 힘을 의미합니다.

미학용어로서의 기는 동양에만 있는 개념입니다. ‘세한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는 그림에서 유독 ‘서기(書氣)’를 강조했습니다. ‘글의 기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림에 앞서 먼저 학식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사기(士氣, 선비의 기운), 또는 권기(券氣, 책의 기운), 문자향(文字香)이라고도 합니다. 추사는 후학들에게 겸재 정선의 그림에는 “서기가 없다”며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천재 화가를 서기가 부족하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림에서 우러나는 기를 중시했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사실성보다 추상성이 강조됩니다.

기(氣)는 동양미학의 최고의 경지

기는 중국 육조시대의 화가 사혁(謝赫, 500~535년경 활동)의 저서 [고화품록(古畵品錄)]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여섯 가지 법칙, 즉 육법(六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첫째가 기운생동(氣韻生動)입니다. 산수화에서는 자연의 기운이, 인물화에서는 정신적인 기질이 나타나야 좋은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골법용필(骨法用筆)로 붓질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응물상형(應物象形) 입니다. 그림은 실제와 닮아야 한다는 사실성을 뜻하는 개념입니다. 넷째는 수류부채(隨類賦彩)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색이 있으며 이를 사실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섯째는 구도의 개념인 경영위치(經營位置), 여섯째는 회화전통의 계승을 뜻하는 전이모사(傳移模寫 )입니다. 이는 수 천년 동안 동양화의 지침이 돼 왔으며 중국과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운생동을 제외하면 그림에서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것들입니다. 화가로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하면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기운생동은 좀 다릅니다. 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이는 동양미학에서 최고의 경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사진도 예외가 아닙니다. 좋은 풍경사진을 보면 장엄한 대자연의 기운에 전율이 일기도 합니다. 또 자연의 맑고, 깊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진은 우리에게 명상의 시간을 갖게 합니다. 밝은 기운의 사진은 일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기분 좋게 치유해 주는 비타민이 되기도 합니다. 아름답고, 화려하고, 신기하고, 색감이 풍부하다고 해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의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풍경사진에서 아마추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아름다움의 최대공약수를 뽑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프레임 안에 이것 저것 너무 많은 요소를 집어 넣게 됩니다. 나의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억지로 꾸미는 ‘남의 사진’을 만들려고 합니다. 당연히 주제가 흐려지고 구도가 무너집니다.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본질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이 품고 있는 정신입니다. 이는 꾸밈으로 해결되는 않는 직관의 영역입니다. 풍경을 보며 번쩍하고 떠오르는 영감에 충실해야 합니다. 비움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단순함으로 주제를 부각시켜야 자연의 기운이 살아 있게 됩니다. 사각형의 프레임을 가진 사진은 취사선택이 매우 중요합니다. 채우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버릴 때는 과감해야 합니다. 사진은 뺄셈의 미학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진의 핵심은 사진을 구성하는 요소를 하나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중국 송대의 화가 곽약허는 “기운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氣韻非師)”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육법의 정론은 만고 불변이다. 그러나 골법용필 이하 다섯 가지는 배울 수 있지만 그 기운 같은 것은 반드시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니, 진실로 교묘한 재주로도 얻을 수 없고 또한 세월로도 이룰 수 없으며, 말 없는 가운데 마음으로 깨달아 그러한 줄 모르는 가운데 그렇게 되는 것이다.”

당나라 시대의 화가 형호(荊浩)도 [필법기(筆法記)]에서 ‘기와 운’을 이렇게 풀어냅니다. “기란 마음이 붓을 따라 움직여 상을 취하는 데 미혹함이 없는 것이다, 운이란 필적을 숨기고 형상을 세워 모습을 갖추는 데 속되지 않은 것이다.”

“기운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곽약허는 깨달음을, 형호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합니다. 두 화가의 말을 종합해보면 ‘기’라는 것은 애써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우러나는 그림의 ‘내공’이 아닌가 합니다. 기운생동이 육법의 첫 번째고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가지 법칙이 완성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회화의 기본기를 탄탄하게 갖춰야 합니다. 종이가 산을 이루고, 물감이 강이 될 정도로 수련을 거쳐야 합니다. 산수화의 기는 오랜 훈련을 거치고 내공이 무르익은 상태라야 가능한 최고의 경지입니다. 대자연의 섭리를 깨우치고, 형상에 마음을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운생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 역시 기본을 다지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진의 테크닉을 많이 익히면 익힐수록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더 크고 넓어집니다. 카메라를 내 수족처럼 부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짧은 시간이지만 풍경에 압도당하지 않고, 풍경을 재해석하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지금 자신의 사진이 부족하다고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기라는 것은 의식하면 할수록 멀리 도망가는 묘한 개념입니다. 곽약허의 말처럼 기는 ‘그러한 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14)] 경(景)·정(情)이 어우러진 환(幻)의 세계 

감탄 넘어 감동 담아야 ... 정서적·감성적 터치 필요 

겸재 정선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화가들이 공통으로 그렸던 산수화가 있습니다. ‘소상팔경(瀟湘八景)’입니다. 중국 후난성의 둥팅호로 흘러 드는 강 소수(瀟水)와 상강(湘江) 일대의 여덟 가지 풍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곳은 중국 최고의 절경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북송 때부터 화가뿐만 아니라 시인묵객이 둥팅호 일대의 풍경을 그림으로, 시문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상팔경이 유행처럼 번져 고려 시대 때부터 이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진1) 메시아, 2014
소상팔경의 첫째는 산시청람(山市靑嵐)입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산촌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둘째는 원사만종(遠寺晩鐘)입니다. 공감각적인 표현입니다. 멀리 산사에서 들여오는 저녁 종소리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어촌석양(漁村夕照)으로 노을에 물든 어촌의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넷째는 원포귀범(遠浦歸帆)입니다. 고기잡이 배가 멀리 있는 포구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다섯째는 소상야우(瀟湘夜雨)로 소수와 상강에 내리는 밤비를 뜻합니다. 매우 낭만적인 표현입니다. 일곱번째는 동정추월(洞庭秋月)입니다. 둥팅호에 비치는 가을 달이라는 뜻입니다. 일곱번째는 평사낙안(平沙落雁)으로 모래가 있는 강가에 앉아있는 기러기를 뜻합니다. 여덟번째는 강천모설(江天暮雪)로 해질녘 눈 덮인 산야의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상적인 산수경 ‘소상팔경’


▎화룡포의 아침, 2016.
조선시대 화가들에게 소상팔경은 관념 속에 있는 이상적인 산수경이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소상팔경을 상상 속에서 그렸습니다. 문인들은 그림을 보며 시를 남겼습니다. ‘관동팔경’이니 ‘단양팔경’이니 하는 ‘팔경’의 유래도 소상팔경에서 온것입니다.

소상팔경은 아름다운 자연풍경의 ‘최대공약수’가 됐습니다. 소상팔경에 등장하는 그림의 소재를 나열해 볼까요. 산·물·구름·안개·비·눈·달·기러기·산사·초가집·어부·고깃배·낚시…. 이는 다른 산수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입니다. 소상팔경은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 마음속에는 가장 이상적인 풍경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산허리를 감고, 계곡마다 드리워진 운해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사진에 몰입하게 됩니다. 아마 산수화가나 풍경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개가 끄덕여지리라 생각합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는 ‘밈(meme)’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일종의 ‘문화적인 유전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술, 철학, 종교, 사회적 관습 등도 모방과 흉내를 통해 복제되며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 조상이 즐겨 그리고, 감상하던 산수화의 소재가 정서적인 DNA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몇 년 전 미국 중서부의 캐년 여행을 했습니다. 레드캐니언, 캐니언랜드, 모뉴멘트 밸리, 아치스 국립공원 등 세계적으로 이름난 관광지입니다. 수억년 동안 만들어진 협곡과 바위가 장엄하고 신비로운 풍광을 연출했습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선뜻 카메라에 손이 가지를 않았습니다. 감탄은 하지만 감동이 없다고나 할까요. 습관적인 관광사진만 찍다가 돌아왔습니다. 낮선 풍경, 익숙하지 않은 지형 때문인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모뉴먼트 밸리에서 찍은 ‘메시아(사진1)’ 정도입니다. 이곳은 백인들의 침략으로 땅을 뺏기고, 죽임을 당한 인디언의 후손들이 자치국가를 세우고 사는 곳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 가장 자리에 삐져나온 인체 조각같은 형상에서 ‘메시아’의 이미지를 봤습니다. 돌탑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인디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미 협곡 여행 중 처음으로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잦은 외침에 시달려온 우리 역사가 오버랩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풍경을 대하는 철학·신념 묻어나야

우리나라 풍경사진 시장은 비좁습니다. 카메라를 배우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인물과 풍경사진입니다. 날씨 좋은 날 ‘국민포인트(사진 동호인들이 많이 몰려 드는 곳)’를 가면 항상 사람들이 몰려 있습니다. 삼각대 설치할 공간도 없이 빽빽하게 서 있습니다. 프로 사진가에게는 재앙(?)입니다. 하는 수 없이 지구촌 오지로 눈을 돌립니다. 벌거벗은 원주민 사진 한 장 쯤 없으면 사진가로 명함도 못 내미는 시대가 됐습니다. 누가 더 오지 깊숙히 들어갔느냐로 승부합니다. 작품성이 아니라 보여주기로 경쟁하는 것이지요. 이른바 소재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사진가가 발로 뛰며 풍경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것이 의미없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찍은 사진이 국민포인트에서 아마추어가 찍는 사진과 다를것이 있을까요? 또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까요? 프로 사진가라면 신비롭고, 장엄하고, 아름다움에만 집착해 셔터를 눌러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풍경사진은 보여주기가 아니라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산수화는 ‘경치 밖의 뜻(景外意)’을 중시합니다. 풍경을 대하는 철학과 신념 등 정신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 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DNA를 건드려 줘야 합니다. 좋은 풍경 사진은 경(景)을 넘어 정(情)이 느껴집니다. 경과 정이 어우러진 ‘환(幻)’의 세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산수를 독창적으로 풀어내는 세계적인 풍경사진가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19)] 사진적인 사진 회화적인 사진 

 

사진은 인간이 세상을 보는 방식 다루는 미학... 고유의 표현문법에 충실해야

▎별헤는 밤, 2015
사람들은 좋은 풍경 사진을 보면 ‘그림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사진이 너무 아름다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담은 것 같다는 뜻입니다. 또 미적인 요소들이 정치하게 구성돼 있어 마치 그린 것 같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칭찬인 줄 알지만 사진가의 입장에서는 뒷맛이 개운치가 않습니다. ‘사진은 그림보다 한 수 아래 매체’라는 인식이 은연 중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림 같다’는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집니다. 사진비평가나 전문가들이 사진에 대해 ‘그림 같다’고 한다면 이는 칭찬이 아니라 욕이 됩니다. 예술의 한 장르로서 사진 고유의 ‘문법’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이 사진다워야 하는데 그림을 흉내낸다는 것이지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뉘앙스도 풍깁니다. 한 때 유행했던 살롱사진의 탐미적인 경향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살롱사진은 사진에 덧칠을 하거나 특수효과를 이용해 그림처럼 보이게 하는 사조의 하나입니다. 지나치게 회화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발견의 미학 선보이며 예술의 영역 개척

사진과 그림은 시각예술이지만 표현기법이 서로 다릅니다. 그림은 상상력의 산물이 될 수 있지만, 사진은 반드시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소재로 삼습니다. 그림과는 문법이 다릅니다. 사진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진의 문법은 사람의 눈과 카메라의 눈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사진은 인간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다루는 미학입니다. 1839년 사진술이 발명되면서 인간은 성능 좋은 ‘사이보그 눈’ 하나를 더 얻게 됐습니다. 카메라는 사람 눈이 가진 한계와 허점을 파고들며 새로운 세상을 선보였습니다. 기계가 열어 젖힌 혁명적인 개안(開眼)입니다. ‘보는 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사진은 ‘발견의 미학’을 선보이며 예술의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이는 사진이 그림과는 다른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오늘날 사진이 예술의 중심 매체로 각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뉴욕현대미술관 사진 큐레이터를 역임한 존 사코우스키(John Szarkoowski, 1925~2007)는 1964년 [사진가의 눈] 전시 서문에서 사진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사물 그 자체(The things itself)입니다. 사진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같은 피사체라도 찍는 이에 따라, 보는 이에 따라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흔히 보는 평범한 대상이라도 정지된 이미지로 표현될 때 그 느낌은 예상보다 더 강렬한 힘을 발휘합니다. 객관적으로 보아왔던 어떤 대상에 주관적인 감정이입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존재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술은 보이지 않은 존재를 현시한다’는 하이데거의 예술론과도 통합니다.

둘째는 디테일(detail)입니다. 사진은 피사체를 사람의 눈보다 훨씬 더 정밀하게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기름때가 덕지덕지 끼어 있는 노동자의 손, 진흙탕 길에 나 있는 바퀴자국, 얼굴의 주름 등 생생하게 표현된 현실의 한 단면은 그 자체로 기호적인 상징이 됩니다. 디테일은 연상작용을 불러 일으키며 시적인 레토릭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사진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담아 냅니다.

셋째는 프레임(Frame)입니다. 사진은 사각의 틀 안에 구현됩니다. 프레임 안과 밖, 취사선택이 극명하게 나눠집니다. ‘화가는 중심에서 선을 긋기 시작하고 사진가는 사진의 테두리에서 표현하기 시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진은 크로핑, 즉 뺄셈의 예술입니다. 현실의 단면들을 잘라내는 프레이밍은 그림에서 보기 힘든 역동적인 구도를 만들어 냅니다. 사진은 현실을 편집하는 기능이 가장 뛰어난 매체입니다.

넷째는 시간(Time)입니다. 사진은 시간을 다루는 매체입니다. 사진에 찍힌 현실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됩니다. 이 시간성이 사진만의 독특한 매력을 뿜어냅니다. 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수백, 수천 분의 일초를 정지된 이미지로 보여주는 순간의 미학은 사진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정지된 이미지로 보여주는 장노출 사진도 사진만이 갖고 있는 매력입니다.

다섯째는 관점(Vantage point)입니다. 사진은 피사체의 특징을 잘 드러내기 위해 매우 다양한 앵글을 구사합니다. 올려 보고, 내려 보고, 틈새로도 봅니다. 피사체의 모습을 온전하게 담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뭔가에 가려진 어느 한 부분을 찍기도 합니다. 사진가는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 많이 움직여야 합니다. ‘사진은 발로 찍는다’는 말은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삶의 복잡다단한 모습들을 드러내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공동체의 가치관을 모색합니다. 풍경사진은 속성상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일상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힐링의 공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연풍경을 다루는 산수화가 태동하던 시대상황도 오늘날과 비슷합니다. 송나라의 대화가이자 이론가인 곽희는 그의 저서 <임천고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화적 아름다움 담되 사진적 사진 고민해야

“백구(白驅)의 시(주나라 시대 재야에 은둔한 현사의 시)와 자지(紫芝)의 노래(한나라 시대 은사의 노래) 같은 것은 모두 당시의 불안한 세상에서 부득이 멀리 은둔한 인사들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임천(林泉)을 사랑하는 뜻과 구름이 안개를 벗삼으려는 것은 꿈속에서도 그리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눈과 귀가 보고 듣고 싶은 것이 단절되어 있는 형편이므로 훌륭한 솜씨를 가진 화가를 얻어 그 산수 자연을 울연(鬱然)하게 그려낸다면 대청이나 방에서 내려가지 않고도 앉아서 샘물과 바위와 계곡의 풍광을 한껏 즐길 수 있으며, 원숭이 소리와 새 울음이 흡사 귀에 들리는 듯하고 산빛 물빛이 어른거려 시야를 황홀하게 빼앗을 것이니, 이 어찌 남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완전하게 사로잡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이 산을 그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근본 뜻이다.”

풍경사진도 사진입니다.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은 산수화의 표현 기법을 흉내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관점에서 산수화의 정신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풍경사진이 차고, 넘치는 시대입니다. 회화적인 사진이 아닌 ‘사진적인 사진’의 표현 형식을 고민해야 합니다. 풍경사진 역시 사진 고유의 문법에 충실해야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10)] 크게 가득 찬 건 마치 빈 것과 같다 

동양화에서 돋보이는 여백의 미학 ... 사진의 여백은 공간적 깊이감 더해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선재도, 2012
어린 시절 얘기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림을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명암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도화지를 빈틈없이 꽉 채워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빈 곳이 있으면 미완성이라고 감점을 받습니다.

우리의 미술교육이 빛과 형태, 면을 중시하는 서구의 전통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정신사는 과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이나, 르네상스 시대 미술작품을 보면 매우 사실적입니다. 실제와 똑같이 묘사하기 위해서 미술작품에 수학과 과학의 원리를 적용했습니다. 황금비율과 원근법이 발달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화가들은 어떻게 하면 실제와 똑같이 그릴 수 있을까에 집착했습니다. 한 때 사실성은 좋은 그림을 판단하는 잣대가 됐습니다. 화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체비례를 연구하기 위해 무덤을 파헤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카메라가 발명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삼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습니다. 바늘구멍의 원리를 통해 반영되는 이미지를 본 떠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늘날 카메라의 원조입니다. 그런데 사진은 부메랑이 되어 화가의 생계를 위협하게 됐습니다. 실제를 똑같이 재현하는 카메라가 있으니 화가의 붓이 무용지물이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화가들은 재현의 전략을 수정하게 됩니다.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느낌까지 그림에 담으려 했습니다. 인상파가 등장하게 된 것도 사진의 영향이 큽니다. 이때부터 그림은 구상에서 추상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서양은 형사(形似), 동양은 신사(神似)

동양미술은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사실성보다 관념적인 정신세계를 중시합니다. 세세한 부분적인 묘사는 생략합니다. 추상성을 강조합니다. 선 위주로 그리기 때문에 여백의 공간이 많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미 기원전부터 추상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학자 유안(劉安 B.C.179?~B.C.122)은 그의 저서 [회남자(淮南子)]에서 ‘근모실모(謹毛失貌)’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림의 핵심은 ‘심상(心像)’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밝은 달빛에서는 멀리 바라볼 수 있어도 잔글씨를 쓸 수 없으며, 안개 자욱한 아침에는 잔글씨를 쓸 수 있어도 멀리 바라볼 수 없다. 심상을 벗어나면 그림 그리는 사람은 터럭 하나에 힘쓰다가 그 모습을 잃는다. 활 쏘는 사람은 작은 것을 겨누고 큰 것을 버린다.’

형사(形似)는 동양미술에서 사실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상대되는 개념으로 ‘신사(神似)’가 있습니다. 형사와 신사는 재현과 표현과도 통하는 개념입니다. 신사는 ‘그림에 마음을 담는다’는 뜻입니다. 서양화가 형사를 중시했다면 동양화는 신사에 방점을 둡니다. 송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소식(소동파)은 “형사로 그림을 논하면 그 식견이 아이들과 다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미술이 형사를 소홀하게 다룬 것도 아닙니다. 형사가 화가로서 반드시 거쳐야 할 훈련 과정이라면 신사는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완성단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수묵산수화의 창시자로 알려진 송나라의 장조는 ‘외사조화, 중득심원(外師造化, 中得心源)’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밖으로는 조화를 배우고 안으로 마음의 근원에서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리는 대상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대상을 분석하고 연구해서 마음에서 나오는 이미지를 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 표현과 재현의 조화를 뜻하는 이 말은 오늘날까지 동양화 창작의 근본 원리가 되는 명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산수화는 면보다 선이 강조됩니다. 선 위주의 그림은 여백을 낳습니다. 먹번짐으로 면을 채우기도 하지만 선이 중심이 됩니다. 붓도 동양과 서양이 다릅니다. 서양의 붓은 뭉툭하고 넓어서 선보다는 면을 그리는데 적합합니다. 동양화에서 사용하는 붓은 끝이 뾰족합니다. 글씨 쓰는 붓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글씨와 그림은 하나’라는 ‘서화동체(書畵同體)’의 전통 때문입니다. 한자는 상형문자입니다. 글씨 자체가 추상적인 그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그림도 잘 그린다’고 말합니다. 서양에는 없는 문인화인 수묵산수화가 발달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백은 버려진 공간이 아닙니다. 사유와 명상의 공간입니다. 또 배경이 비어 있는 만큼 상대적으로 전경은 돋보이게 됩니다. 산수화의 여백에는 주제를 강조하는 역설의 미학이 있습니다. 풍경사진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늘·구름·안개·운해 등이 여백의 소재가 됩니다. 또 기술적으로 여백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하는 아웃포커싱이나 셔터타임을 길게 하는 장노출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사진의 여백은 공간적인 깊이감을 더해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사진은 선재도 풍경입니다. 뿌연 해무가 밀려와 멀리 있는 산이 허공에 떠 있는 섬처럼 보입니다. 텅 빈 하늘에 갈매기 두 마리가 날고 있습니다. 갈매기의 날갯짓이 울림이 되어 넓은 여백을 채웁니다.

동양화의 여백은 노장사상의 영향도 있습니다. 무(無)를 중시하는 노자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대영약충(大盈若沖)’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크게 가득 차 있는 것은 마치 빈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노자는 ‘빈 그릇’과 ‘집’을 예로 듭니다. 그릇과 집의 진정한 쓸모는 가시적인 형체가 아니라 그 형체가 만들어 내는 빈 공간에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아웃포커싱·장노출로 여백 만들 수도

도종환의 시 [여백]은 화가는 물론, 사진가도 마음에 두어야 할 여백의 미학을 이야기합니다. 여백은 예술도 사람도 아름답게 합니다.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나무 뒤에서 말없이/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넉넉한 허공 때문이다/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출처 : 사진과여행 공간
글쓴이 : 럭키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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