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get
앗제는 스티글리츠와 더불어 현대사진의 원점으로 인식된다.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활약한 작가로서 '카메라의 시인'이라 불릴 만큼 그의 생애가 다분히 전설적인 데다가 사진마다 시적 정감이 풍긴다. 1856년 프랑스의 항구도시인 보르도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뱃사람의 잔심부름이며 스무살때는 떠돌이 극단의 배우로 언제나 가난에 허덕이는 삶의 밑바닥 생활로 어둡고 고달픈 청춘을 다 보냈다. 정상적이지 못한 생활형편으로 인해 열살 연상인 과부와 동거생활을 하는 등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마흔 살이 갓 넘었을 때 파리로 와 사진가로서의 생활이 시작된다.그는 광학렌즈가 달린 낡은 카메라를 마련하여 파리시내를 두루 다니면서 촬영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화가들에게 팔았다. 달리 돈벌이 할 것이 없었던 그는 죽을때까지 그렇게 연명해갔다. 그의 사진은 화가들이 정확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자료로 쓰였는데, 그는 파리의 몽빠르나스의 빈민 아파트에서 '화가를 위한 자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라져가는 파리시내의 건물과 많은 장소를 찍었다. 제 1차 세계대전후 정부의 기록보관소가 그의 사진들을 사 주었다.
앗제는 한편생을 세상과 떨어져 고독하게 살았다. 우울증과 자폐증으로 여러사람앞에선 주눅이 들어 뒷전에서 혼자서만 시간을 보냈다. 이런 앗제를 발견한 것은 미국의 화가이며 사진가인 만 레이Man Ray였다. 앗제가 사망하기 일년전인 1926년 그는 앗제의 사진 넉점을 초현실주의자들의 기관지에 실어 주었고, 그의 조수인 미국의 여류사진작가 애보트에게 그를 소개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 되었고, 앗제가 남긴 2천여장의 원판과 1만여장의 사진들을 찾아내어 1968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영구 보존하게 되었다.
Atget 2.
생전에는 그렇게도 불운하게 살다가 이름없이 죽어간 그가 오늘날에 와서는 사진의 역사에 업적을 남긴 대가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그의 사진이 오늘날에 와서야 높이 평가를 받는 있는 이유는 세기를 걸쳐 넘어오는 전환기의 사진가로서 지난 세기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세기가헤쳐나갈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룩한 사진의 업적은 예술을 표방하던 살롱사진가들에 의해서 등한시 되었던 사진의 기본인 기록성을 원점으로 돌려놓았고, 기록성만으로도 예술성을 살릴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파리시내를 가치있는 자료로서 기록했고, 자신의 밑바닥 인생도 기록함으로써 그의 사진의 가치는 기록성에 귀결된다. 그러나 흔히들 앗제의 사진을 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사진은 현실속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현실에 숨어있는 시의 세계를 찾아 내기 때문이다. 그가 현실에 있는 시의 세계를 찾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대상에 정서적 반응의 기질탓이다. 그는 현실에 접근할 때 머리보다도 가슴을 앞세우는 사진가이다. 그의 대상에 대한 정서적 반응은 생활감정의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쌓이기 마련인 앙금을 가슴으로 느꼈다. 현실속에서 삶의 진실을 느낀 것이다. 이런 느낌을 통해 대상과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사진은 자연 분위기 조성이 주종을 이루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모두가 화면속에서 한데 어울어져 화음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다.
앗제의 파리 사진에는 파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공기감이 깃들어있다. 그리하여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마저 든다. 이러한 생활감정의 교감이 바로 높이 승화된 시적인 경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사진을 찍은 것은 예술사진의 표방이 아닌 밥벌이로 기록한 것들에 불과하다. 예술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단순한 기록만으로도 위대한 예술가로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상과 깊은 내면적 공감을 이루었느냐는 것이다. 앗제의 경우 의도하거나 뚜렷한 자신의 의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가 깊이 빠져 있던 고독의 늪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간절한 만남의 욕구가 사진을 통해 독자들과 공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천성적인 감수성과 민감한 직관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타고난 예술적인 재능이 모진 고생과 시달림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옥외, 그리고 거리의 전면이 아닌 뒷골목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서, 어디든 감히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를 못내고 문밖에서 서성거리며 사진을 찍었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 사진을 찍었다. 촬영시간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시간이었고,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있었다고 해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이웃뿐이다. 그는 매우 여리고 숫기가 없어서 안심하고 마음을 놓을만큼 만만한 사람들 앞이 아니면 셔터를 누르지도 못했다. 이렇듯 은밀하고도 호젓하게 혼자서 떠돌던 그는 대상과의 비밀스러운 내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을 찍는 일이 그의 유일한 밥벌이 수단이었지만 심리적으로 자신을 대상에 드러내는, 모든것과의 단절속에서 오직 하나뿐인 만남의 통로가 무의식중에 사진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사진은 생계수단이기도 했지만 자기구원의 방편이기도 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닫혀있던 세상으로의 출구가 열리는 것이었다.
그의 사진은 시간적이라기보다는 공간적이다. 유동하는 시간보다는 정지된 공간속에서 정신적 안정감을 맛볼 수 있다. 고요가 쌓이는 공간, 막연한 기대와 여운이 짙게 깔려있는 공간이다.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이 빠져버린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인간의 생활감정인, 다름 아닌 인간의 체취인 것이다. 앞으로 나타날 예감으로서의 숨결이 화면속에 나타나 있다.
스티글리츠
스티글리츠는 1864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모든일에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그의 아버지는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1881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고, 스티글리츠는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으나 2년후,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사진화학을 전공했다.
그의 본격적인 사진활동은 1887년무렵이었는데 이 해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찍은 사진이 런던에서 공모한 현상에 일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이로부터 채 3년이 안되는 기간동안 150개가 넘는 상을 받을만큼 그는 사진활동에 몰입했고 사진은 그의 전부가 되었다. 1890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사진제판업에 손을 댔으나 그리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사진찍는 일에 열중했으며,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지도에 여념이 없었다. 1893년부터 96년까지 사진잡지의 편집을 맡기도 했고, 1897년엔 그를 중심으로 모인 사진작가들이 사진클럽을 만들고 기관지로서, <카메라노트 Camera Note>를 창간했다.
그가 미국 사진계의 중심인물로 떠오른 것은 1902년 사진분리파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이다. 사진분리파운동은 20세기의 분수령을 넘어서는 역사적인 운동인데, 사진분리파photo-Secession Group)란 다름아닌 그가 새로 조직한 사진클럽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클럽의 이름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진의 기치를 내건 선언으로서 낡은 사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따로 새롭게 나선 파(派)란 뜻이었다. 사진분리파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그는 1903년 기관지<카메라워크Camera Work>를 창간했고, 1905년에는 '291'이라는 화랑을 열었다. 기관지는 1917년까지 간행되었고 화랑은 사진분리파의 발표무대뿐 아니라 전위적인 미술가들에게도 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하여 화랑'291'은 현대사진의 산실일뿐만 아니라 미국현대미술의 모태이며 미국의 전위적인 예술혁명의 진원지로 부각되었다. 1917년을 고비로 사진분리파운동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미국이 휘말리면서 독일계 이주인인 그에게 모든 상황이 불리했기 때문이다. 종전후 그는 공식적인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작업을 계속하며 새로운 화랑을 열었다. 전쟁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는 사진의 새로운 변신을 꾀하였다. 일상적인 사회적 현실에서 인물이나 구름쪽으로 그의 관심이 바뀌어갔고, 30년대로 가서는 그가 자란 뉴욕을 중심으로 한 건물들에 쏠렸다. 그의 여생은 주로 화랑을 통해 신인들의 발굴과 이들의 뒷받침에 힘을 기울여 현대사진의 아버지로 받들어지게 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났다.
Stieglitz 2.
스티글리츠가 사진가, 사진운동가로서 사진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세잔느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크다. 19세기 사진의 역사가 그에게서 일단 끝나고 20세기의 사진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은 그의 순수사진straight photography 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진분리파운동이 내건 순수사진이란, 일찌기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가 사진을 발명할 당시 신봉되었던 순수한 기계적 기록성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즉, 렌즈가 본래 갖고 있는 정확하고 정밀한 광학적인 기능을 사진의 기본으로 다시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얼핏 보기에 단순하고 대수롭지 않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주장은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는 지표가 되었다. 1839년 사진이 발명된 이래로 사진의 역사적인 흐름을 크게 두갈래로 이어져 왔다. 하나는 실용적인 목적으로서 사진의 기계적 기록성에 바탕을 두고 대상의 충실한 재현에 기록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적으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치중한 예술사진이다. 그러므로 기계적인 기록성은 기록사진에 있어서 절대적인 기본원리인 데 반해, 예술사진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서 기록사진과 예술사진은 서로 별개의 것이 되었고 이 두갈래의 흐름은 더욱 저마다의 길로 치달아 간격이 벌어졌다. 스티글리츠의 순수사진운동의 의의는 이렇게 상반되는 두갈래의 사진의 흐름을 하나로 통합하여 변증법적인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데 있다. 그가 기치를 든 순수사진 운동은 기록사진의 노선을 따르면서 사진의 예술성을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동안 예술성을 추구해 온 모든 예술가들의 지약과 한계의 굴레라고 결정을 내린 사진의 기록성이 오히려 사진의 독자적인 예술성이 자리잡을 터전임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예술의 기본미학을 사실주의 바로 그것이라고 간파하였다. 문예사전상의 사실주의란 '어떤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해도 훌륭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주의주장'이라 정의되는데 이는 19세기 중반부터 고조되어온 세계적인 추세로 이러한 입장에서 대상에 새롭게 접근하려는 예술적 시도였다. 그는 사진이야말로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가장 적합한 예술형식임을 간파한 것이었다. 사진의 과학적인 속성이 자연과학적인입장에서 대상을 새롭게 발견하려는 예술적인 조짐의 첨단임을 주장한 것이다.
그의 사진세계는 1917년을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뚜렷하게 갈라진다. 전기는 철저한 사실주의의 추구이고, 후기는 사실주의를 딛고 넘어서 은유적 사실성의 세계를 새롭게 전개한 시기이다. 전기를 대표하는 것은 <삼등선실>, <종점>, <5번가의 겨울>등이며, 후기를 대표하는 것은 Equivalent 시리즈와 인물 및 건축사진들이다. 전기의 사진들에는 순수사진, 즉 사실주의 이념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의 카메라는 현실 속으로, 현실의 한복판을 직시하고 접근한다. 살롱사진과 같은 대상의 미화에만 급급하지 않고 대상을 철저히 파헤쳐 끝내 흔들리지 않는 참다운 삶의 리얼리티를 제시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진세계는 후기에 와서 다르게 변모된다. 객관적인 현실에 은유적인 상징성을 부여함으로 자기자신의 감정이입을 꾀한 것이다. 20년대부터 작업한 계속된 구름사진들이 이를 대변한다. 구름사진들의 제목들은 모두가 equivalent인데 이는 '동등한 것' 또는 '대응하는 것'이란 의미로 자신의 마음과 동등한, 대응되는 무언가를 표현하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 사실주의의 구체적인 설명성 대신 은유적인 상징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실주의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 클로즈업을 통한 정물적인 대상파악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정물처리는 사실주의의 확대이며 강화인 동시에 부분을 통한 전체의 암시이다. 부분강조를 통해 화면밖으로 밀려난 부분을 암시하여 상징성을 살리려는 의도였다. 사진의 눈을 통해서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까지 드러내고자 함으로써 20세기 현대사진의 주춧돌을 형성한 셈이었다. 후기의 이러한 은유적인 사실성의 추구는 폴 스트랜드 Paul Strand와 F.64 group으로 이어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Man-Ray
Man-Ray 1.
만 레이는 1890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년대부터 30년대 사이에 일어났던 다다이즘과 쉬르레알리슴 운동의 중심인물로 회화,조각,영화,사진 등 여러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그는 고등학교시절 건축에 관심이 있었으나 후에 뉴욕에 진출해서 미술학교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이때 마르셀 뒤샹과 프란시스 피카비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아 다다이즘과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사진은 열여섯에 취미로 시작했는데 1921년 파리로 이주하고부터는 회화적인 방법보다는 사진에 의한 실험적인 작품제작에 전념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사진에 몰두하였다.1951년 다시 파리로 돌아온 후 일단은 사진을 떠나 입체적인 구성작압에 몰두하였다.
1977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원래 화가인데 사진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뉴욕에서 번진 다다운동과의 인연에서 비롯된다.1908년 미국 현대산진의 아버지라 일컫는 스티글리츠에 의해서 시작된 다다운동은 '291'이란 화랑을 개설하고, 존 마린, 막스 웨버 및 유럽의 전위 예술가들의 작품전을 적극적으로 열어 미술에 혁신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아모리 쇼 Amory Show'를 가져오게 하였다. 1913년 아모리 쇼는 이질적인 예술개념을 가져옴으로써 미국 현대 미술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는데 마르셀 뒤샹이 가장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피카비아와 함께 1915년 뉴욕에 다다이즘 운동지부를 개설하였다. 이때부터 스티글리츠와 함께 다다이즘운동을 지원하였고 뒤샹을 쫓아 파리로 갔다. 그는 운좋게도 그 당시 패션계를 주름잡던 뽈쁘와레의 패션사진을 맡아 일거리를 잡았다. 이러한 생활여건과 관련해서 사진적인 수단을 통한 전위적인 조형추구의 실험에 몰두하게 되었다.
Man-Ray 2.
현대미술에서 회화가 사진적 수단을 맨 먼저 끌어들인 것은 다다이즘 운동에서이다. 크리스티안 샤드, 만 레이 그 밖의 다다이스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주로 사용된 조형방법은 포토그램과 포토몽타쥬 등이었다. 이들의 새로운 조형적 관심이 사진으로 쏠리게 된데는 전통적인 가치와 수단에의 전면적인 거부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사진은 인습의 지배를 받지 않는 최신의 표현매체였고 다다이즘을 꿰뚫은 회화의 기본 이미지는 기계적 이미지이기 때문이었다.
또다른 이유로서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방법의 붕괴를 꼽을 수가 있다. 인간의 감관기관(感官器官)이 생득적인 인식기능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절대적이라고 믿어져 왔는데 현대에 이르러 인간의 인식방법은 한낱 상대적인 것이고 얼마든지 미지의 또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다다이스트들은 사진의 눈을 빌어 새로운 지각의 지평을 열려고 하였다. 이같은 맥락에서 사진을 실험적 수단으로 끌어들인 다다이즘은 앞서 일어난 표현주의, 입체파, 미래파에 이어 쉬르레알리슴과의 사이의 과도기적인 것이었다. 이점에서 다다이즘은 앞서 일어난 양식의 발전이라는 과제를 제기하는데 그치고 쉬르레알리슴에게 마무리를 넘겨야했다.
쉬르레알리슴은 다다이스트들이 전통적인 유산을 모조리 거부함으로써 문화적 무정부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밝혀낸 무의식의 세계와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진로를 발견하였다. 논리적인 합목적성과 합리적인 인과법칙에 의해 구속되어 있는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에서 억압된 요소들을 파괴함으로써 발견되어지는 의외성과 경이감이 쉬르레알리슴의 미학이다.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에 잠재하고 있던 이미지의 촉발과 환기인 것이다. 그래서 쉬르레알리스트들은 끊임없이 이질적인 요소를 재래적인 시간과 공간의 상관관계속에서 끌어내어 비합리적인 괴리의 상태로 재결합시킴으로써 무의식의 심층속에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이미지를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만 레이에게는 회화마저도 자기세계를 추구하는 하나의 도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전위예술가들은 흔히 형식보다는 주관적인 내용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만 레이가 시도한 특수기법을 이용한 사진표현은 그 이전에도 많이 시도되어 왔던 것이나 거의가 기법상의 신기함에 머물렀을 뿐 그 기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타당성이 없었던 것이다. 만 레이의 사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러한 문제극복에 있었다. 다다이즘과 쉬르레알리슴이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현대의 새롭게 변혁된 시대의식으로서 이에 따른 만 레이의 일련의 사진작업들은 전통적인 사진의 길과는 다른 또하나의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다.
Bresson.
그는 노르망디 지방의 커다란 섬유회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때부터 그림과 사진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화가가 될 생각으로 1927년부터 2년 동안 그림 공부를 했다. 그러나 1930년부터는 사진을 하고 싶은 욕망을 누를 길 없어 스물 두 살 때 마르세이유에 가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했다. 그가 라이카 사진기를 갖게 된 것이 이때부터인데 일평생 라이카만 애용했다. 1932년부터는 2년동안 스페인 지중해 연안, 멕시코, 미국의 각지를 다니면서 각종 사진을 찍었다. 이때에 찍은 <폐허에 노는 아이들>은 그시기의 대표작이다. 그의 작품 경향은 현실 속에서 비현실적인 것을 직감적으로 발견한다는 성질의 것으로 애초부터 계획을 세워 영상을 짜내는 식이 아닌 것이다. 그는 피사체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가 그것을 가장 의미깊은 양상으로 나타났을 때, 또는 가장 사람의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자세로 되었을 그 순간, 즉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데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작품에는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인간적 흥미가 지극히 강렬한 점이다. 그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또는 인간을 향한 끊임없는 흥미를 사진에 표현하는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1936년 봄, 그는 파리의 어느 신문사의 사진부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사시험을 보았는데 보기좋게 낙방되고 말았다. 이때에 로버트 카파와 데이비드 시모어도 응시했으나 모두 실패하고,그날 우연히 어느 카페에서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교류가 시작되었으며 후일에
Bresson 2.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초기는 렌즈의 사각에 의해서 원근감을 강조하여 사진 독자적인 조형 효과를 화면에 나타내고 있는가 하면 1938년부터는 민중의 세태를 강렬한 인간적 흥미로써 보완하고 있는데 절대적인 순간에 시간을 맞추어 대상이 갖고 있는 현실감을 강하게 화면에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군에 종군하여 영화사진반에 참가했으나 1940년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 신세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몇 번이고 탈출을 기도하여 실패를 거듭하다가 1943년에 겨우 목적을 달성, 파리에 돌아와서는 항독지하운동에 참가했다. 이때부터 그는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가인 인물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마티스(Matisse, henri), 브라크(Brauge, Georges),루오(Rouault, Georges)들을 찍으면서 이들 예술가의 내면적 정신의 깊이를 어떻게 화면에 정착시킬 것인가에 노력을 쏟았다. 그의 작품전은 1946년에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대규모로 가졌었는데 그후 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947년에는 그와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모어 등이 중심이 되어
그는 절대로 연출시키지 않으며, 트리밍하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1952년에 출판한 <결정적 순간>은 그의 사진미학을 나타낸 것으로 촬영 대상의 움직임 중 가장 좋은 순간을 가장 적절한 시간에 포착했다. 그 순간이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적인 것이 아니고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나타난 순간이다. 더구나 주위와의 관계와 광선 등의 상태까지 포함해서 "광선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된 순간" 즉, "대상과 촬영자의 내부의식의 일치"를 문제삼고 있는것이다. 그는 미국사진가협회, 독일사진가협회등으로부터 문화상 등 많은상을 받았으며 1975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Evans
Evans 1.
사진사에서 1920년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시기였다. <라이프>,<루크> 등의 창간과 더불어 사진이 전달매체로서 포토저널리즘의 터전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고, 모홀리-나기와 웨스턴 계열의 조형파 사진가들이 사진의 예술성을 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도 예술성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나선 시기이다. 워커 에반스는 이러한 시기에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이룩한 사진가이다. 1903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을 시카고와 뉴욕에서 보낸 그는 처음엔 문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1922년 앤도버의 필립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곧바로 윌리엄즈 대학으로 진학하였으나 26년 대학생활을 포기하기까지 학교생활은 1년밖에 하질 않았다. 이에 걱정한 그의 아버지는 그를 파리의 소르본느로 유학을 보냈으나, 1년밖에 생활하지 못했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증권거래소 점원으로 일했다. 이 무렵 사진을 시작한 그는 1928년 문학의 꿈에서 사진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1930년 <하운드 앤드 혼 Hound and Horn>이라는 잡지에 사진을 기고하기 시작하면서 이 잡지의 편집장인 링컨 커스틴의 권고에 힘입어 뉴잉글랜드 지방에 있는 빅토리아풍의 옛 건물들을 찍어 1934년 그 사진들을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하였다. 1932년에는 쿠바를 찍기 위해서 촬영여행을 했으며 1935년에는 아프리카 흑인미술을 찍었다. 같은 해에는 사진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농업안정국 사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농업안정국 F.S.A.가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경제공황과 가뭄으로 시달리는 농민과 농장 노무자들의 참상을 세상에 알려 국민의 여론을 규합하려는 사회적인 운동이었다. 그런데 그는 정부의 홍보선전이라는 공식적인 기록의 한계를 넘어 삶의 진실을 깊이있게 추구하였다. 이 작업은 1935년 6월부터 1938년 여름까지 미국 동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행해졌다. 1938년에는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미국의 사진American Photographs>이라는 사진전과 아울러 사진집을 출판하였다. 1940년에는 구겐하임 재단의 기금을 지원받아 중서부 지방 소작인들의 생활상을 찍어, 이듬해 <유명한 사람들에게 찬사를 보냅시다 Let us Now Praise Famous Men> 라는 긴 제목의 사진집을 냈다. 1943년부터 45년사이에는 <타임>지의 기자가 되었으며, 45년부터 65년까지는 <포춘>지의 일반기자 겸 사진기자로 활약하였고, 후에는 부편집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65년부터는 예일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고, 68년에는 윌리엄즈대학으로부터 명예학위를 받았다. 71년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다. 이로부터 4년뒤인 1975년 코네티컷 주 뉴해븐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vans 2.
워커 에반스의 사진세계는 조향적인 공간성의 추구와 시적인 감정이입을 특징으로 한다. 이 두가지 요소는 대개의 경우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는 소홀히 취급되기 쉬운 부분이나 에반스의 사진에서는 그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사실성을 밑받침하고 있는 기본이 된다.
먼저 그의 조형적인 공간성의 추구는 정감어린 분위기와 융합되었으며, 사진주인공들이 등장하는 화면은 단순한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이 생존하고 있는 현실상황으로 파악되어 조형적인 공간성인 사실적인 현장감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화면속에서 현실을 재현할 때 그대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조형의 틀속에 재구성 함으로써 사진속에서 단순한 통일을 이루고 주제가 뚜렷이 부각된다.그는 대상에 접근할때 거의 대상과 평행관계를 유지한다. 이같은 반응은 피사체가 움직이건 움직이지 않건 모두가 조형적 공간의 틀속에 시각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선, 면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공간성의 파악인데, 다큐멘터리사진에 이같은 시각의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현실을 그대로 기록할때 들어가게 되는 군더더기를 제거해 버리고 본질적인 요소만을 집중적으로 강조할 수 있었다.
둘째로 감정이입은 정지된 조형공간속에 시적인 감성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현실의 한복판에 서서 대상을 기록하면서도 현실을 시적으로 발효시킨 독특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지적인 인식보다는 감성적인 인식을 앞세운 그의 감정이입은 첫째, 느낌으로 대상을 받아들이는 일과 둘째로 이것을 정감어린 분위기로 화면에 되살리는 일이다. 이 분위기는 다름아닌 삶의 현장 속에 구석 구석 배어있는 생활감정에서 우러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빈집이나 건축물 사진에서 잘 드러난다. 인물만을 강조할 때는 상대방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개방한 상태에서 서로가 편안함을 느낄때 셔터를 눌러 서로 심리적인 깊은 동화를 이룬다. 결국 그의 사진에서의 감정이입이란 그와 대상이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심리적으로 정서적인 화합을 이루는 것이다.
미국의 사진적 전통에서 볼때 에반스의 사진은 독특하다. 전통을 이으면서도 이질적인 요소를 첨가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의 조형적 공간성은 스티글리츠의 후반기 사진에서 드러나는 클로즈업 사진이나 스트랜드의 즉물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시적인 감정이입은 앗제에서 까르띠에-브레송으로 이어지는 전통과 이어진다. 이렇게 에반스는 새롭고도 독특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길을 열었으며 1950년대 등장하는 영상파 사진가들에게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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