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을 찾아서 2014/8/24일 창덕궁 정문 돈화문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昌德宮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은 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은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에 복구되었다. 이후 순조 3년 선정전 서행각에서 난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이듬해에 중건된 후, 철종 7년 해체· 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 앞뜰의 품계석은 정조 6년에 설치된 것이다. 인정전 좌·우로는 동행각 36칸과 서행각 38칸이 딸려 있다.
대조전
대조전의 지붕 용마루기와가 아주 특이합니다
대조전은 왕비가 생활하던 중궁전의 건물이다.태종 5년(1405년)에 처음 지었으나 그후 여러차례 불에 탔다. 현재 건물은 1917년 불타서.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다 다시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 침실 주위에는 왕과 왕비의 잠자리를 지키는 상궁들이 쓰는 작은 방들이 있다.
대조전이라고 지은 이유는 임금(大)을 만드는 처소라고하여 그렇게 지은 것이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하여 대조전엔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펌글]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해있던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하고 있다. 중희당과 수강재를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건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56년(영조 32)에 화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영조대에도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고종대에 들어와서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종종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였다.
낙선재에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여사 일본의 왕족으로 태어나 고종의 넷째아들 영친왕(英親王)과 정략결혼한 후 비운의 역사와 시련 속에 살아온 고(故) 이방자 여사는 1963년 영친왕과 함께 국적을 회복하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후 이방자 여사는 장애우들의 어머니로서 살아가며 장애인 복지사업을 펼쳤다.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의 호를 딴 명휘원을 설립한 뒤 장애인들에게 기술과 직업적 전문성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밖에도 영친왕 기념사업회, 신체장애 특수학교인 명혜학교 등을 설립해 봉사의 삶을 보냈다. 1989년 창덕궁 내 낙선재에서 선종했다. 1989년4월 30일, 서울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장례는 1989년 5월 8일, 각계 인사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의민태자와 합장되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그 밖에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사전검색 색출]
나 멋진생각은 개인적으로 영친왕비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장례행사요원으로 금곡홍유릉까지 다녀왔었기에
낙선제 탐방에 감회가새롭다
낙선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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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아쟁 합주곡 - 돌아가고 싶은 고향(명상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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