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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삶이야기

[스크랩]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by 동아스포츠 / 相 和 2019. 1. 6.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꼭대기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고아가 아니었지만 고아처럼 외롭게 사는 삶,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다고 느끼는 삶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비참함이 가슴 아프다. 도대체 그 억울한 시련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지 궁금했다. “우우, 우, 우”하며 더듬는 소리로 자신의 처지를 차마 말하지 못하고 건너뛰는 것 같다. 답답한 외침 속에는 고독한 가족사가 숨겨져 있고, 공부를 잘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가지 못하고 사무원으로 일해야 했던 시인의 삶이 쓰리다.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크게 공감할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데 사람들은 꽃다운 청춘을 바치며 살아간다. 시들고 난 청춘을 뒤로 한 채 낮아진 사람들은 갈 곳을 잃는다. 그걸 알면서도 높은 빌딩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아이러니는 계속될 것이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나날을 살다가 헌책방에서 만난 행운은 시인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운명적 경험이었다. 『곰곰』은 곰곰이 생각하며 읽어야 할 시집이다.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철철철 흘러가는 말의 폭포에 휩쓸려, 가르고 견주고 맞세워 꼼꼼히 따질 겨를이 없다. 환각과 환청과 착란이 뒤범벅된 실존의 비굴과 영혼의 가난이 속속들이 배어 있지만, 시니피에는 시니피앙의 물살에 떠밀려 시라는 거짓말의 소용돌이로 순식간에 빨려든다. 시니피에는 바닥에 납작 깔린다. “악몽처럼 반복되는/일상”(「몽유병」)과 “시든 언어”의 시니피에는 켜켜이 쌓이고 알뜰히 썩어, 부글거리는 시니피앙의 우울한 거품으로 시의 표면에 부글거린다. 이 거품은 “언어를 언어로 꿰어 멸망한 부족” (언어물회)의 후예인 곰곰족(族) 시인이 외우는 주문 같다.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수메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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