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저의 운명관(運命觀)을 술회한 사색적 철학적 에세이라 서정적인 글처럼 물 흐르듯 스므스하게 읽히지 않을 것이기에 시간을 가지고 여유롭게 차분히 대하셔야 독파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집중이 필요하여 배경음악을 깔지 안했습니다. 주제 사진은 신문에서 캡쳐하였고 나머지 사진들은 제가 작년 말에 이곳 파주로 이사해 오기 전 살던 양주에서 가을에 촬영한 것들입니다. 운명의 사랑 범 공 천
얼마 전 4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탈리아 제노바 모란디 다리 붕괴 사고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운전자가 화제가 됐다. 그것은 다리가 끊긴 부분에 위태로운 모습으로 간신히 정지된 녹색 트럭 한 대의 사진이 전 세계에 전파됐는데, 목숨을 건진 녹색 트럭 운전자는 한 승용차가 앞질러 추월하는 바람에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늦춤으로써 붕괴 지점 직전에 멈추어져서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산자와 죽은 자의 운명의 뒤바뀜이 참으로 극적이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4년 전의 해양사고로, 인천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교 학생 대부분이 사망한 끔직한 대형 참사가 발생했는데, 그 뒷얘기에 의하면 다른 고등학교에서는 사고를 당한 고등학교보다 한 발 뒤늦게 예약 신청을 하는 바람에 선박을 이용한 제주도 수학여행 기회를 놓쳐서 담당 직원이 질책당하고 난처했지만 결국은 사고를 면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억세게 운 좋은 학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운명의 엇갈림이나 뒤바뀜을 전화위복(轉禍爲福) 또는 새옹지마(塞翁之馬)로 대신 표현되기도 하는, 운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비슷한 경우를 적지 않게 보고 듣기도 하고 또 스스로 경험하기도 한다. 아무런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경우를 우리는 우연이라고 하는데 이런 우연을 나는 언제부턴가 운명론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운명론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논리적인 인과관계 같은 것을 아예 배제해버려서 아무런 원인도 없이 결과만 있다. 이를테면 미개인이 자신이 미리 정해진 날에 죽도록 운명 지어졌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봤자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운명이 어떤 전능의 힘을 가지고 세상만사를 지배한다는 사상은 동서고금을 통해 철학이나 종교 문학 과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인간사에 영향을 끼쳐왔다. 특히 그리스 말기의 스토아파 철학자들은 '세상만사는 미리 정해진 필연적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 주장하여 운명의 필연성에 복종할 것을 권했다. 중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사상 중에도 아우구스티누스나 캘빈의 예정설(豫定說)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로 미리 정해진다.’는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도 니체는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감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즉, 아모르파티(amor fati/Love of fate)라 하여 요즈음에는 우리 대중가요나 소설 제목 혹은 애명으로도 애용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양에서는 중국 천명설(天命說)이나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사상 등에서 운명론적 색채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운명론이나 운명론자들은 주어진 운명에 복종하고 사랑하는 것이 순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는 학생 시절 한때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를 생활 모토로 내걸기도 해서 나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선택하는 삶의 철학을 견지하였는데, 그런 철학과 자세가 언제부턴가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십 수 년 전부터 거의 운명론자로 변해버렸다.
삶이 아무리 불만스럽고 어렵더라도 이것을 나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게 주어지는 고난과 어려움 등에 굴종한, 운명의 노예가 되어 삶을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든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과 같이 우주와 이 세상을 주관하는 절대자에게 오만하지 않고 순응하며 유한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지혜로운 삶의 태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작년 암 수술을 받고 치유 즁이고 또 언제 생을 마감할지 그리고 자식들의 삶의 기복 등 모든 라이프사이클이 나의 바람과 의지와 상관없이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믿으려 한다. 그래서 이제 사소한 문제까지도 ‘이건 운명이야! 라고 속으로 외치며 자위한다. 이것은 내가 천성적으로 유별히 소심한데다가 한 치의 실수도 허용치 않는 - 1퍼센트의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군사문화에 젖은 탓에 완벽주의를 지향하고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늘 불안하고 사사건건 부질없는 걱정에 시달려온 지난날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몇 년 동안의 이런 훈련을 통해서 지금은 나와 관련된 어떤 상황에도 크게 동요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이런 분위기를 오래 끌고 가지도 않는다. ‘이것은 운명이야, 그러니 걱정은 부질없는 짓이야! 다른 생산적인 것에 관심을 돌려!’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고 위축되지 않도록 격려한다. ‘출생과 죽음은 피할 수 없으므로 그 사이를 즐겨라’는 매력 있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인생이란 생명(生命,태어남)과 운명(殞命,죽음)의 사이에서 운명(運命, 생명을 운영 혹은 운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절대자의 손에 쥐여져 있으니 나의 자유 의지 영역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運命), 그러니까 내 생명의 운영 또는 운전함에 있어서 내가 아닌 다른 대리운전자 즉, 절대자에게 운전대를 맡겨버릴 수는 없다. 직진할 것인지 방향을 바꿀 것인지 여러 개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를 내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결과는 운명에 맡기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운명에 굴종하고 노예가 되어 삶을 체념하는 소극적인 운명론자가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가치를 전환하여, 나의 삶을 보다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드라이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기우(杞憂)의 고사성어가 된 기(杞)나라 어떤 사내처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 봐 불안해하는 것과 같은 근심 걱정과 온갖 스트레스를 맑은 가을하늘처럼 걷어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자세로, 죽음까지도 한 점 주저함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운명론자가 되어야 한다. 아모르파티, 나의 운명을 사랑하자! -2018.9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그런삶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You Needed Me / Anne Murray.....고유의 명절 풍성한 한가위 잘 보내세요 (0) | 2018.09.20 |
---|---|
[스크랩]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모릅니다 (0) | 2018.09.14 |
[스크랩] 한노(寒露) / 이상국 (0) | 2018.09.12 |
[스크랩] 그대 힘겨워하지 마세요 ... 도종환 (0) | 2018.09.06 |
[스크랩] 눈물겹고 고달팠던 지난 시절 (0) | 2018.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