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잔의 추억과 함께 옛 종로거리를...
한잔의 추억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면은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취한 눈 크게 뜨고
바라보면은
반쯤 찬 술잔위에
어리는 얼굴
마시자 한잔의 추억
마시자 한잔의 술~
마시자~ 마셔 버리자
기나긴 겨울밤을
함께 지내며
소리없는 흐느낌을
서로 달래며
마주치는 술잔위에
흐르던 사~연
흔들리는 불빛위에
어리던 모습
그리운 그 얼굴을
술잔에 담네
마시자 한잔의 추억
마시자 한잔의 술~
마시자~ 마셔 버리자
어두운 밤거리에
나 홀로 서서
희미한 가로등을
바라보면은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행여하는 마음에
뒤돌아 보면
보이는건
외로운 내 그림자
마시자 한잔의 추억
마시자 한잔의 술~
마시자~ 마셔 버리자
마시자~ 마셔 버리자
옛날의 종로거리에 대한 추억을 적은 글입니다.
제목 : 그리움의 거리, 종로
정정자
새천년의 시작이라며 온 거리가 축제인 양 술렁이던 지난해 연말이었다.
종로타워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이 개업을 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그곳으로 나가 종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도로 건너 편 제일은행이 있는 자리에는 옛날 신신백화점이 있었고,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에는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그 자리에 종로타워라는 흡사 우주선처럼 생긴 초현대식 빌딩이 들어선 것이다.
나는 이 장소에서 인생의 전성기인 2, 30대를 고스란히 보냈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화신백화점은 그 시절에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백화점이었다.
더구나 승강기까지 있어 시골에서 올라오면 이곳을 다녀가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었다고도 했다. 지금 종로 네거리는 서로 경쟁하듯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래도 제일은행만 지나면 교보빌딩까지는 비교적 겉모습만 조금씩 바뀐 채로 그대로 있는 편이기에 편안한 마음이 되어 혼자서 어슬렁대기도 한다.
나는 젊은 시절 친구들과 서울 시내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그 중 종로는 주로 내 생활권이었다. 정확히 표시하면 광화문 네거리부터 종로네거리를 지나 인사동 입구까지가 내 집이나 다름없었다.
그 거리에는 꽤 이름 난 음악다방과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참으로 좋아했다. 요즈음에는 FM방송에, 집집마다 오디오시스템까지 있어 스위치만 누르면 어디에서나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60년대에는 내 소유의 오디오는커녕 라디오조차도 꿈속의 물건이었다.
회사에서 퇴근하면 가까이에 있는 음악다방이나 감상실로 직행하곤 했다. 그곳에는 성능 좋은 오디오시스템이 있어 내가 신청한 곡을 쉽게 들을 수 있었고, 또 유리벽 안에 앉아서 신청곡을 들려주는 디스크자키의 멋진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뮤직박스 벽면을 가득 장식한 레코드판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몹시도 호기심을 자아냈다. 주로 내가 많이 찾은 곳은 무교동의 세시봉과, 종로1가 영안빌딩에 있던 르네상스이다.
그 이외 음악다방으로는 영풍빌딩 자리에 명, 광화문의 초원, 여로, 종로2가 고려당 옆에 있던 보리, 그리고 YMCA빌딩 지하다방은 아직도 미니2층인 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음악감상실로는 pop음악 전문인 종로의 디쉐네 뉴 월드 세시봉이 있었고, classic만 들려주던 르네상스와 지금 이 자리 3층에 있던 메트로가 유명했다. 그 중 가장 오래 남아 있던 곳이 르네상스였다.
새로 들어선 제일은행 빌딩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2, 3분 거리에는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동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있다. 그 입구 농협과 사잇길 모퉁이에 5층 건물인 영안빌딩이 있다.
1층은 외국 서적만 취급하는 자그마한 서점이 있었고, 2층은 아마 이름이 희였던가? 주로 리듬이 강한 hard rock을 들려주었고, 3층은 조금 부드러운 pop song과 그 때 인기 있던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들려주는 향원다방이 있었다. 그리고 4층에 르네상스가 있었다.
그 시절 르네상스는 가난한 음악도들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군복을 검게 물들여 입은 미래의 음악도들이 곡명을 적어 놓은 칠판 앞에서 홀 안 가득 울리는 음악을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나는 그들이 지휘하는 음악에 심취한 관객이 되기도 했다.
나에게 종로거리는, 더구나 르네상스가 있던 영안빌딩은 다만 다방이나 음악감상실이라기 보다는 지나간 날의 그리움과 아릿한 아픔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회사 같은 부서에 나와 동갑인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나와는 다르게 자기 주장이 강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소위 맹렬 여성이었다.
일찍 사회 생활을 시작한 나는 항상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그 갈증은 그녀 앞에서 언제나 나를 주눅 들게 하고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에게 다가왔다. 아마도 그것은 적극적인 성격과 자신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pop song만 즐겨 듣던 내가 고전 음악에 눈을 뜬것은 그 친구 덕분이었다. 그녀의 안내로 나는 르네상스를 드나들기 시작했고, 짧은 동안이지만 우리는 종로에 있는 음악다방이나 음악감상실을 휩쓸고 다녔다.
얼마 후 그녀는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사표를 내어 던지고 학업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꿈은 언론사의 기자나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정말 그녀는 몇 년 후 이름 있는 일간 신문사의 문예부 기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날갯짓을 하는 그녀를 부러워만 하고, 꿈도 없이 그저 르네상스에 틀어 박혀 나 혼자만의 틀 속에 웅크린 채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 방황하던 많은 젊은이들은 음악으로 위로하였고, 그들에게 낭만을 구가하고, 정신적 위안을 주던 안식처였던 르네상스는 내 청춘과 나란히 6, 70년대를 보내고 80년대초 경영난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빨간색 남방을 즐겨 입고, 머리를 올 빽으로 넘긴 채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휴게실에 앉아 계시던 르네상스 설립자인 박용찬씨는 79세의 나이로 지난 94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분의 분신이었던 르네상스도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빌딩은 종로거리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음악실에 파묻혀 세월 가는 줄 모르던 젊은 날의 추억에 젖곤 한다.
그곳을 사랑하던, 이제는 나이가 들었을 그 음악애호가들은 모두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도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그곳에 고여 있는 젊은 날의 추억을 되새기리라.
그래도 순수했던 나의 20대, 르네상스에 데리고 가 준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느 만큼 늙어가고 있을까? 20대에 넘치던 자신감은 아직도 살아 있을까? 가슴이 답답해 질 때면 나는 지금도 종로거리에 나온다. 그리고 많은 인파 속에 휩싸여 광화문에서부터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걷는다.
그 자리에 빛 바랜 채 서 있는 건물과, 흐르는 음악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활기차게 다니는 젊은이들을 보며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세월 따라 겉모습은 모두 변하고 그곳에 다시 가 볼 수 없다 해도 종로는 나에게 젊은 날에 대한 아련함과 추억의 거리로 언제까지나 내 가슴에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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